◇ 시인과 시(현대)

박진형 시인 / 페디큐어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30. 05:00

박진형 시인 / 페디큐어

 

조그만 발톱에서 새로운 꽃 돋아나

꽃밭이 마법으로 풍성해질 때까지

발걸음 사그라지는 발끝을 생각한다

 

어머니 흔들리는 건 그늘을 입기 때문

씨방 속 남은 열기로 닳은 당신 세워보면

점묘된 눈물자국은 혼잣말을 삼킨다

 

돌아본 발자국 소리 얼굴을 내밀 때

그믐달 위로 하나 둘 피어난 바닥꽃

꽃잎은 울지 않기 위해 발끝부터 타오른다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시

 


 

 

박진형 시인 / 다비

 

 나를 지우는 법마저 이제는 잊어야겠다

 

 뼈가 차갑다면 살은 포근한 줄 알았던 시간, 무엇보다 철저히 지문을 도리고 싶었으니, 장작 위에 누워서도 펴지 못한 손아귀 그림자 만들다 자오선에 베였으니, 불어라 솔바람이여 타거라 허풍선이여 송진이 호박 될 만큼 오래된 농담이었으니, 가시거리 너머 송진 가득 품고 하늘로 피어올랐으니, 열기로 가득한 장작더미 위에 공기 한 겹 걸칠 뿐 돌아서기 쉬운 혀를 옮겨본 적 없으니, 바람이 허물을 벗기면 윤곽은 사라지고 추스르지 못한 뼛속, 미련은 졸아붙으니

소리는 미덥지 못해 내내 타오르겠다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책만드는집, 2022) 수록

 

 


 

 

박진형 시인 / 절망처럼 자라는 우기가 내 몸을 눅일 때

 

 잠글 수 없는 빗물이 유리창을 두드려 밖을 내다보다 이내 고개 떨굴 때 시계는 불투명하여 누설되지 않습니다

 

 인력시장 못 가니 며칠째 한숨입니다

 

 눈시울 뜨거워지고 바짝 목이 타는데 마른 몸 꿈꾸고 나면 햇볕이 돋아날까요

 

 바람에 유리창이 일순간 덜컥입니다

 

 마르지 않는 빨래가 건조대에서 시들고 수심이 깊어집니다

 

 축대는 비에 젖고 그늘진 곳일수록 전운이 감돕니다

 

 밑 모를 두려움이 반지하로 넘쳐흘러 발치가 아찔합니다

 

 술병은 나뒹굴고 아버지라는 이름으로 싸워야 하는 수중전

불현듯 회오리 불어 그늘이 술렁입니다

 

 방안을 점령한 것은 맴도는 침묵뿐

 

 음습한 목소리가 배경으로 돌아가면 빗방울에 갇힌 하루가 희미하게 번집니다

 

 손끝은 떨리기만 하고 숨결은 아득하고 유례없는 누수인지 수위가 높아가는데 저승은 멀기만 하고 이승은 꿉꿉합니다

 

 습기가 절망처럼 자라 부은 몸 휘청입니다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책만드는집, 2022) 수록

 

 


 

박진형 시인

전남 구례 출생.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 학사, 불어불문학과 석사, 외국어교육과 박사과정 수료. 1989년 서울대학교 대학문학상 소설 당선. 2016년 《시에》로 시부문 등단. 2019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 현재 용인문학회 편집위원, Volume 동인 회장, 시에문학회 부회장, 시란 동인. 시조집 <어디까지 희망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