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경묵 시인 / 도리뱅뱅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31. 05:00

임경묵 시인 / 도리뱅뱅

 

 

교통사고로 중환자실에 계신 아버지 만나러

주말마다 천안 내려갈 때

아산만 방조제 지나 늘 만나던 버들집

도리뱅뱅을 잘한다는 그 집

어탕국수가 제법 맛있다는 그 집

아버지 퇴원하면 단둘이 한번 와보려고 꾹 참고 지나쳤던 그 집을

아버지 삼우제 지내고 들렀습니다

혼자 도리뱅뱅을 주문하고

혼자 도리뱅뱅을 먹었습니다

죽음의 주모자를 찾을 수 없게

입 꼭 다물고

사발통문처럼 누워있는 빙어들……

한 마리 한 마리 또옥 또옥 떼어먹었습니다

아버지 퇴원하면

어스름 저녁 어깨동무하고 비밀스럽게 오려고 했던 버드나무 아래 그 집에서

젊은 날 아버지처럼

맥주잔에 소주 반 병 따라 놓고

혼자만,

혼자만,

혼자만 도리뱅뱅을 먹었습니다

뜨거운 팬을 뱅글뱅글 돌려가며 먹었습니다.

 

 


 

 

임경묵 시인 / 개그맨 1

 

 

 119 구급대가 옥탑방에 도착했을 때 개그맨의 웃음은 경직이 진행되고 있었다. 침대에서 발견된 낡은 수첩에는 그가 심장에 장착하려던 웃음 목록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한 웃음, 저자극성 웃음, 첫출발이 불안한 웃음, 초대받지 못한 웃음, 앞니 두 개가 쏙 빠진 웃음, 귀가 얇은 웃음, 속눈썹이 긴 웃음, 위급할 때 짠 하고 나타나는 웃음, 투철한 직업의식을 가진 독재자의 웃음, 인체공학적인 웃음, 무중력 웃음, 가장자리가 어슴푸레한 웃음, 벼룩의 낯짝 같은 웃음, 쥐꼬리만 한 웃음, 늘 수면 부족에 시달리는 웃음, 끓는 물에 살짝 데친 웃음, 딱 한번 웃기고 폭삭 늙어 버린 웃음, 격자무늬 패턴을 가진 웃음, 중요할 때 꼭 딸꾹질해 대는 웃음, 볼빨간 사춘기 웃음, 유통기한이 지난 웃음, 살균 효과가 있는 웃음, 비밀리에 웃음 치료를 받은 적 있는 웃음, 슬픔과 기쁨의 이종교배로 태어난 웃음…….

 

 


 

임경묵 시인

1970년 경기도 안양 출생. 공주대학교 한문교육학과와 한신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 2008년 하반기 《문학사상》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으로 『체 게바라 치킨 집』 『검은 앵무새를 찾습니다』가 있음. 2006년도 제8회 수주문학상 수상. 2011년 대산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