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조은길 시인 / 성냥과 피임약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3. 31. 05:00

조은길 시인 / 성냥과 피임약

 

 

 꿈에 죽은 어머니가 오셔서 어서 전쟁 준비하라며 뚜껑도 안 뜯은 사각 성냥 한 통을 주고 가셨다 뚜껑을 열어보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가다 피를 토하고 풀려난 어린 어머니의 핏빛 무명 저고리가 오도가니 꿰어있고 그때 끌려간 수많은 어린 처녀들의 짓뭉개진 아랫도리가 줄줄이 꿰어있고 6.25때 연합군 흑인 병사들에게 윤간당하고 숯검정 같은 핏덩이를 ​안고​ 시퍼런 못물 속에 뛰어들고 말았다는 순자 이모​ 퉁퉁 불은 젖가슴이 꿰어있고 밥을 먹다 벗은 발로​ 북으로 끌려간​ ​남편의​ 신발을 댓돌 위에 올려놓고​ 유복자를 홀로​ ​키웠다는 ​당숙모의 쩍쩍 부르튼 손이​ 꿰어있고 ​피난 행렬 속에서 ​성냥이 든 지전 주머니를 ​쓰리 당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굶었다는 어머니​ 어머니의 쪼그려 붙은 배꼽이 꿰어있고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성냥과 양초와 조리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와 상비약과 최신식 현금 전대와 나와 딸아이를 위해 가스총과 피임약 몇 통을 샀다

 

-시집 <입으로 쓴 서정시> 2019

 

 


 

 

조은길 시인 / 도마와 침대 사이

 

 

조용히 등을 돌리고

옷을 홀랑 벗기거나

마구 주물럭대거나

속을 확 뒤집거나

오독오독 쥐어뜯거나

잘근잘근 난도질하거나

달달 볶거나

펄펄 끓는 물속에 집어넣거나

꼬챙이를 쑤셔 박거나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도마와 침대 사이

 

 


 

조은길 시인

1955년 경남 마산 출생. 방송대 국문과를 졸업. 199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3월'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노을이 흐르는 강』(서정시학, 2007) 『입으로 쓴 서정시』가 있다. 청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