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은길 시인 / 성냥과 피임약 외 1편
조은길 시인 / 성냥과 피임약
꿈에 죽은 어머니가 오셔서 어서 전쟁 준비하라며 뚜껑도 안 뜯은 사각 성냥 한 통을 주고 가셨다 뚜껑을 열어보니 태평양 전쟁 때 일본군 성 노예로 끌려가다 피를 토하고 풀려난 어린 어머니의 핏빛 무명 저고리가 오도가니 꿰어있고 그때 끌려간 수많은 어린 처녀들의 짓뭉개진 아랫도리가 줄줄이 꿰어있고 6.25때 연합군 흑인 병사들에게 윤간당하고 숯검정 같은 핏덩이를 안고 시퍼런 못물 속에 뛰어들고 말았다는 순자 이모 퉁퉁 불은 젖가슴이 꿰어있고 밥을 먹다 벗은 발로 북으로 끌려간 남편의 신발을 댓돌 위에 올려놓고 유복자를 홀로 키웠다는 당숙모의 쩍쩍 부르튼 손이 꿰어있고 피난 행렬 속에서 성냥이 든 지전 주머니를 쓰리 당하고 눈앞이 캄캄해지도록 굶었다는 어머니 어머니의 쪼그려 붙은 배꼽이 꿰어있고
나는 어머니 말씀대로 성냥과 양초와 조리하지 않아도 먹을 수 있는 먹을거리와 상비약과 최신식 현금 전대와 나와 딸아이를 위해 가스총과 피임약 몇 통을 샀다
-시집 <입으로 쓴 서정시> 2019
조은길 시인 / 도마와 침대 사이
조용히 등을 돌리고 옷을 홀랑 벗기거나 마구 주물럭대거나 속을 확 뒤집거나 오독오독 쥐어뜯거나 잘근잘근 난도질하거나 달달 볶거나 펄펄 끓는 물속에 집어넣거나 꼬챙이를 쑤셔 박거나 아무도 끼어들지 않았다 도마와 침대 사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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