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성춘 시인 / 여백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7. 05:00

김성춘 시인 / 여백

 

 

대릉원이 참 맑다

무덤은 섬

무덤은 여백

 

늙은 포플러나무 위 저 까치 부부

왕들과 함께 지금 산책중이다

무덤이 내게 말했다

삶은 아주 짧은 환상적 여행이라고

 

아, 죽음이

맑고 푸르다

 

왕들이 떠나고

왕이 아닌 나도

노을처럼 잡초처럼 곧 그렇게 떠나겠지만

나는 오늘 살아서

그로테스크한 페허 속 걸어간다

그로테스크한 오늘 속 걸어간다

 

오늘은 잠시 지구라는 별에 여행 와서

초현실 무덤 사이를 걷는다

살아서 걷는 이 사소한 즐거움

맑고 푸른 이 삶의 여백

늙은 포플러나무 위 저 까치 부부도

잘 안다

왕릉 옆 저 이쁜 구절초도 잘 안다

 

 


 

 

김성춘 시인 / 모차르트를 듣는 새벽

 

 

산골짝 물소리가 여물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둣빛 고기떼들이 물살에 반짝인다

노래는 뜨겁고 슬픔은 깊다

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 고맙다

아름다운 날들이 푹푹 쌓였으면 좋겠다

새벽의 맨발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짙은 눈썹의

왜가리 한 마리

사무치게 먼 숲을 바라본다.

 

 


 

 

김성춘 시인 / 콜 니드라이

⸻막스 부루흐에게

 

 

저녁이다

당신의 슬픈 음악이 나는 좋다

길은 점점 어둑어둑해 오고 나는 어둑어둑해 오는 방죽 길 따라

혼자 걷는다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리며

 

나는 황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음악처럼 슬프다 아니 슬프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

어제도 그랬고 옛날에도 그랬다

 

저녁이다

둥근 저녁이다

첼로가

흰 별의 맨발을

간곡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 오고,나는

저무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린다

저녁이다

 

* 콜 니드라이: ‘신의 날’을 의미.유대교에서 속죄의 날 저녁에 교회에서 부르는 성가.

 

 


 

김성춘 시인

1942년 부산에서 출생. 1974년 《심상》 신인상에 〈바하를 들으며〉 외 4편이 당선되어 등단. 시집으로 『방어진 시편』 『섬, 비망록』 『그러나 그것은 나의 삶』 등. 한국문협울산지부장과 경남문협부지회장 역임. 현재 한국시인협회 기획위원, 국제펜클럽울산펜회장. 울산대 시창작학과 주임교수. 경상남도문화상수상, 제1회 울산문학상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