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춘 시인 / 여백 외 2편
김성춘 시인 / 여백
대릉원이 참 맑다 무덤은 섬 무덤은 여백
늙은 포플러나무 위 저 까치 부부 왕들과 함께 지금 산책중이다 무덤이 내게 말했다 삶은 아주 짧은 환상적 여행이라고
아, 죽음이 맑고 푸르다
왕들이 떠나고 왕이 아닌 나도 노을처럼 잡초처럼 곧 그렇게 떠나겠지만 나는 오늘 살아서 그로테스크한 페허 속 걸어간다 그로테스크한 오늘 속 걸어간다
오늘은 잠시 지구라는 별에 여행 와서 초현실 무덤 사이를 걷는다 살아서 걷는 이 사소한 즐거움 맑고 푸른 이 삶의 여백 늙은 포플러나무 위 저 까치 부부도 잘 안다 왕릉 옆 저 이쁜 구절초도 잘 안다
김성춘 시인 / 모차르트를 듣는 새벽
산골짝 물소리가 여물다 아이가 피아노를 치고 있다 연둣빛 고기떼들이 물살에 반짝인다 노래는 뜨겁고 슬픔은 깊다 갓 낳은 달걀 같은 하루가 고맙다 아름다운 날들이 푹푹 쌓였으면 좋겠다 새벽의 맨발이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한다
짙은 눈썹의 왜가리 한 마리 사무치게 먼 숲을 바라본다.
김성춘 시인 / 콜 니드라이 ⸻막스 부루흐에게
저녁이다 당신의 슬픈 음악이 나는 좋다 길은 점점 어둑어둑해 오고 나는 어둑어둑해 오는 방죽 길 따라 혼자 걷는다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리며
나는 황혼 앞에서 아무것도 아니다 아무것도 아니기 때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는 것은 당신의 음악처럼 슬프다 아니 슬프지 않다 당신은 당신의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는 사실을 기억하는가 아름다운 음악을 들으며 한 사람이 죽었다 어제도 그랬고 옛날에도 그랬다
저녁이다 둥근 저녁이다 첼로가 흰 별의 맨발을 간곡하게 어루만지고 있다 하늘이 점점 더 어두워 오고,나는 저무는 방죽 길에 서서 오지 않는 별을 기다린다 저녁이다
* 콜 니드라이: ‘신의 날’을 의미.유대교에서 속죄의 날 저녁에 교회에서 부르는 성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