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신용 시인 / 달 외 1편
김신용 시인 / 달 ―두곡 시첩
달이다. 슈퍼문이란다. ‘세상에서 제일 큰 달’이라고 말하면 우스울까? 타원 궤도의 달이 지구에 가장 가까이 다가 온 것이지만 내 눈에는 그냥 ‘세상에서 제일 큰 달’로 보인다. 만월이라는 우리네 말로 하면 묵은 장맛이 나겠지만 슈퍼문이라고 하면 피자나 햄버거 냄새가 날까? “달을 본 지도 참 오래 되었다” 이 구절이 언제나 마음속에 멍울처럼 박혀 있다. 달을 보면서도 달을 못 본 것은 내가 캄캄한 밤이었기 때문이지만, 내가 캄캄한 밤이었으므로 달이 내 등 뒤에 멍울처럼 박혀 있었다는 것은 미처 깨닫지 못했다. 또 그런 밤이면 나는 멍울을 꺼내 얼굴을 비쳐보는 날도 있었지만 어떤 무늬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표정은 흐린 입김처럼 뿌옇게 거울에 서렸다. 표정 없는 달의 건널목지기 같은 얼굴 한 생을 관통해 온 오랜 공허의 건널목―. 그런데 이 밤, 지나가는 것은 달인데 왜 자꾸 커다랗게 얼굴이 떠오를까? 기억이, 월행(月行) 같아서일까? 달이 떠서 질 때까지의 족적(足跡)―, 그 사이, 저 둥그런 만월―. 멍울이지만 지워지지 않는 얼굴―. 어제, 유모차에 의지해 허리가 기역자로 굽은 할머니가 혼자 산길을 타박타박 걷는 것을 보았다. 유모차에는 굽은 허리로 캔 봄 산나물이 소복 담겨 있었다 그리고 오늘 재래시장 장날, 산나물 한 움큼이 담긴 바구니를 앞에 놓고 장터 한 귀퉁이에 오두마니 앉아 있었다
달이다. 그래, 슈퍼문이다. 세상에서 제일 큰 달―. 년간 『화성작가 』 2022년 겨울 발표
김신용 시인 / 오동꽃, 오동나무 ―두곡 시첩
오동꽃을 보면서도 무슨 꽃인지도 모른 채 한 해를 보내고 올봄, 길바닥에 뚝뚝 떨어져 있는 보랏빛 꽃을 보며 이 꽃은 무슨 꽃일까? 궁금한 낯빛만 지었는데 오늘, 오동나무 밑을 지나다가 낡은 보행기에 의지한 채 굽은 허리 더 굳지 않게 아그작 아그작 걷는 연습을 하는 할머니에게, 이 꽃나무가 무슨 나무인지 물으니 무심한 눈길로 ‘이 나무는 오동나무여’ 하신다. 예? 오동나무요? 놀란 눈빛으로 반문을 하는 나를 보며 할머니는 다시 ‘아 봉황이 날아와 산다는 오동나무도 몰러?’ 하는 웃음 섞인 핀잔을 던진다. 그 웃음이 너무 정겨워 보여 그러면 이 나무도 할머니 시집올 때 심은 거예요? 하고 농담을 건네자 ‘그려, 이 시골구석으로 시집와서 첫 딸애 낳자말자 심은 거여! 그러나 세월이 하 야속혀서 나무 베어 궤짝하나 못 맹글고 지나 나나 이렇게 늙어만 가고 있는 거여!’ 하며 다시 활짝 웃는 할머니의 눈매에도 오동꽃빛이 물들어, 온통 보랏빛으로 물든 오동꽃을 닮아 보여, 할머니의 살아온 날들은 폐가처럼 허물어져 보이지만 그 폐가에서 숨 쉬고 있을 젊은 날의 시간은, 저렇게 높게 자란 고목이 되어서도 흐드러지게 보라 보랏빛 꽃을 피우는 오동나무처럼 보여 굽은 뼈 더 굳지 않게 폐가가 다 된 집에서 아그작 아그작 걸어 나와 산모롱이 길 걷는 연습을 하는 할머니의 어깨며 무릎에서도 흐드러지게 피었다가 보랏빛 물든 꽃들을 뚝뚝 떨어트리는 그 지워지지 않는 시간의 발자국들이 보여― 년간 『화성작가 』 2022년 겨울 발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