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배윤주 시인 / 들꽃 베개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9. 05:00

배윤주 시인 / 들꽃 베개

 

 

보랏빛 들국화, 하얀 쑥부쟁이, 이름 모를 작은 들꽃들

 

베갯잇마다 꽃수 놓으신 어머니

 

들꽃 베개 하나 받쳐 주셨다

 

먼데 산골 집 굴뚝에서 불 냄새 한 움큼 끄집어낼 때쯤

 

풀 먹인 광목 위 수실의 까칠함이 잠을 흔들면

 

방바닥을 미지근히 덮여오던 새벽 장작불

 

한 뼘씩 번져오는 구들장의 따듯함에

 

어린 아침은 다시 스르르 잠들어 버렸다

 

밤사이 식어버린 아궁이에 불을 지피듯

 

설움을 모르도록 따뜻했던 아랫목

혼자 잠드는 오늘 밤

 

칭얼대는 졸음을 눕히면 나약하게 감기는 눈 속에

 

꿈에 본 얼룩처럼 배어 나오는 꽃 그림자

 

귓전에 낯익은 맥박 소리 곁에 와 눕는다

 

눈꺼풀 옆으로 흐르는 한 가닥 풀잎에 눈을 찔린 듯

 

야트막한 천장에 생살 같은 함성으로 별들이 핀다

 

 


 

 

배윤주 시인 / 먼지의 자백

 

 

침묵의 모습으로 내려앉은 먼지는

 

위에서 아래로 부재중의 시간을 재고 있다

 

날실과 씨실 사이에서 진동하는

 

갈등을 읽었을까

 

생 표피에서 떨어져 나와

 

고독사한 통증 얼마나 많이 보았을까

 

전두엽의 골짜기에서 뻗치던 충동의 오후

 

몸을 숨긴 채 녹록한 일상을 모두 지켜봤을 눈이다

 

비워두었던 심장의 두근거림까지 털어내면

 

감추어둔 자백은 봉오리마다 꽃잎 스치는 소리

 

잎이 꽃을 사모하는 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세상을 다 적시며 비 내리던 밤에

이유 없이 깨어 우는 줄 만 알았다

 

모로 나앉았던 말들도

 

빗방울 소리로 다가오는 밤이다

 

 


 

 

배윤주 시인 / 달빛등대

 

 

노을 저편에서 눈 뜨는 그는

빛의 등 뒤로 더욱 짙어지는 어둠의 은유

가는 길 밝혀주려 그 자리에 두 발 묻었는가

 

다가갈수록 커지던 음영

풀벌레 소리처럼 흔들린다

내 안의 원점으로부터 솟아오르는 소리

 

스스로 빛을 내는 달빛등대는 그림자가 없다

 

직립했다면

홀로 걸어가야 한다

 

정면의 순간 발목에서 자라난 검은 빛이 앞서 내달린다

바람 한 올 펴내지 못하는 치밀한 속도

쏟아 내리는 눈빛 헤치며 가는 걸음 멈출 수 없다

 

투명하게 채워지는 침묵이 빗물처럼 내리는데

불 끄지 못한 그가 한 발로 서 있다

 

 


 

배윤주 시인

충북 영동에서 출생. 경인교육대학 졸업 및 한국교원대학 교육대학원 졸업. 2019년《시와 경계》 신인상을 통해 등단. 시집 『옆으로 누운 말들』. 한국시인협회 회원. 『현대시학』동인. 시산맥 시회 특별회원. 현재 안산 정재초등학교 교장으로 재직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