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형심 시인 / 채련곡采蓮曲

파스칼바이런 2023. 4. 11. 05:00

최형심 시인 / 채련곡采蓮曲

-허난설헌 풍으로

 

 

 산앵두 붉은 손끝 물에 어리네. 연잎선 부채질하는 저편의 님 그림자 꽃잎에 포개지네. 물 위에 푸른 귀를 가만 대고 수련잎이 님의 목소리 엿듣고 있는 하오下午, 바람이 수련의 분홍빛 볼을 꼬집으며 희롱할 제, 쪽빛 반푼사로 물빛을 누빈 구름 한 채 덮고 이 몸은 흔들리네. 수루水樓에 걸린 하늘 한 폭 끊어다 주름 잡으면 청동빛 잎들 사이로 공중이 번지네. 이마에 찬물을 얹고 물 아래를 걸어가는 간밤의 빗발을 생각하네. 나비 한 마리 물 젖은 공중에서 날아오르고, 님의 소맷자락 그늘에 든 연잎들 서로 스미네, 서로 번지네. 실바람 이음수로 수놓은 이편과 저편, 꽃밥에 배부른 청노새가 님 태우고 수양버들 사이로 사라지네. 수련잎에 내려앉은 서러움이 제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가라앉고 있는데, 꽃이 되지도 못하고 이 몸은 목선木船에 홀로 앉아 열꽃 번지네.

 

웹진 『님Nim』 2023년 2월호 발표

 

 


 

최형심 시인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과정 수료.University of Dayton School of Law 수료. 2008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저서로는 심훈문학상 수상시집 『나비는, 날개로 잠을 잤다』가 있음. 2009년 아동문예문학상 동화부문 수상 및 2012년 한국소설신인상, 2014년 제4회 시인광장 시작품상, 2019년 제23회 심훈문학상 수상. 웹진 『시인광장』 편집장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