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전윤호 시인 / 공공도서관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11. 05:00

전윤호 시인 / 공공도서관

 

 

저 숲을 이룬 아파트들

손보다 높이 올라간 서가들

창마다 불이 켜진 무덤들

어차피 다 읽어 볼 수도 없는

색인표 하나씩 둘러쓴

잃어버린 왕조의 유물들

내 살아온 얘기 책으로 쓰면

소설책 열 권도 모자라지

월세 올리러 온 노인이

엘리베이터 타고 올라가면

퀴퀴한 침묵이 내리누르는

망자들의 열람실에서

눈에 불 켜고 무덤을 뒤지는 도굴범들

빌릴 수는 있어도

가질 수는 없는 집들

은행이 말한다

당신은 연체 중입니다

대출 금지입니다

 

 


 

 

전윤호 시인 / 못난이 감자

 

 

아들이 어릴 때

엄마 상 차리는 거 돕는다고

수저를 놓곤 했다

젓가락이 어려워

가끔 머리가 반대로 놓이기도 했다

잘못 놓은 젓거락 한 벌처럼

아내는 나와 반대로 잔다

내가 코를 곯기 때문이다

코앞의 맨발은

못생긴 감자 같다

엄지는 너무 크고

새끼발가락은 뒤틀렸다

이십 리 길을 걸어 초등학교를 다녔다더니

일하느라

지금도 매일 걷는다

내일을 위해 거꾸로 잠든

아내를 바로잡을 수 없다

그저 내 감자가 얼지 않도록

이불을 덮어 주는 수밖에

주차장에서 취객이 차를 걷어찼는지

경보기 소리가 오래 울렸다

 

 


 

전윤호 시인

1964년 강원도 정선 출생. 동국대학에서 역사 전공. 1991년 월간 《현대문학》의 추천을 받아 등단. 첫 시집 『이제 아내는 날 사랑하지 않는다』 『순수의 시대』 『연애소설』 『늦은 인사』, 최근의 『아침에 쓰는 시』(2019)에 이르기까지 열 권의 시집을 펴냈다. 『천사들의 나라』(2016)로 한국시인협회에서 주관하는 '젊은 시인상'을 수상. 2020 편운문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