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배정원 시인 / 아름다운 그늘

파스칼바이런 2023. 4. 14. 05:00

배정원 시인 / 아름다운 그늘

 

 

봄부터 가을까지 방 안에서

안 나간 적이 있었다

창밖만 바라보고 지냈다

창밖엔 좁은 마당이 있었고

목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봄부터

그는 꽃을 틔우고 차츰 이파리도 피워 갔지만

내가 바라본 것은

꽃잎도 잎사귀도 아니었다

다만 난 꽃의 그늘과 잎사귀의 그늘만을

보았다 어떤 그늘도 그늘은

단지 그늘이었다

목련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제 그늘을 묵묵히 키워가고 있었고

어느 날 문득,

앙상하게 아름다운 그늘을 내게 보여주었다

제 몫의 그늘을 그리고 또 지우며

나무는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1998) 수록

 

 


 

배정원 시인

경희대 국문과 졸업. 1993년 <문화일보> 신춘문예에 시 <그리운 약국>이 당선. 시집 <지루한 유언>. 1998년 동시, 동요교육서 <나의 첫 동시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