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정원 시인 / 아름다운 그늘
배정원 시인 / 아름다운 그늘
봄부터 가을까지 방 안에서 안 나간 적이 있었다 창밖만 바라보고 지냈다 창밖엔 좁은 마당이 있었고 목련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봄부터 그는 꽃을 틔우고 차츰 이파리도 피워 갔지만 내가 바라본 것은 꽃잎도 잎사귀도 아니었다 다만 난 꽃의 그늘과 잎사귀의 그늘만을 보았다 어떤 그늘도 그늘은 단지 그늘이었다 목련나무는 봄부터 가을까지 제 그늘을 묵묵히 키워가고 있었고 어느 날 문득, 앙상하게 아름다운 그늘을 내게 보여주었다 제 몫의 그늘을 그리고 또 지우며 나무는 나를 나무라고 있었다
시집 『지루한 유언』 (청년정신, 1998) 수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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