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명보 시인 / 붉은 지붕이 있는 간이역 외 2편
박명보 시인 / 붉은 지붕이 있는 간이역
소소해서 눈에 드는 것들이 있다 그 작은 간이역처럼
낡은 것들만이 지니는 온화함을 아는 듯 그곳엔 속도에서 비켜난 사람들이 머물다 가곤 한다
간혹 늦은 밤 귀뚜라미 울음소리가 들리거나 길 바깥을 기웃거린 어린 꽃잎들이 귀환을 거부하는 여린 병사의 몸짓으로 날아들기도 했는데
그 역사의 지붕이 왜 붉은지……
ㅡ 붉은 우체통은 너무 상투적이야 당신은 말하겠지만 거창하게 납득시킬만한 이유가 아니라도 어느 레일위에도 몸 싣지 못하고, 어느 곳에도 도착하지 못한 거주불명의 밤들이 있는 것이다
진부해서 그리운 아날로그 그 밋밋한 이마를 만지고 있을 때 불안을 거처삼은 내 안의 누군가 이 몸도 간이역이라고, 오래된 아픔을 불러내듯 우체통, 그 캄캄한 입속을 자꾸 들여다보는 것인데
-<시와사람> 2010. 겨울호
박명보 시인 / 바람의 신부*
오스카 코코슈카*
때로 사랑은 절망과 이음동의어이지 난간에 서 있는 자의 잠은 자주 위태롭네 푸릇푸릇 날 선 칼날을 신고 허공을 건너는 밤 해독되지 않는 불안이 임파선처럼 퍼져나가네 상상은 착지를 모르지 운명이라 믿었던 것들도 궁극의 자서에서 찢어낸 한 장의 파지일 뿐, 누구의 내부도 되지 못한 자 스스로 벼랑이 되지
알마 밀러* 우리 모두 바람의 유전자를 지니고 있죠 별이 탄생하던 그 순간부터 (포효하는 광휘 속에서 하나의 빛이 폭발할 때) 우주의 행간을 떠돌던 낱말들이 우리가 알지 못하는 기호로 몸에 새겨져 있는 걸요 모든 별들의 고향은 허공이며 어둠이죠 편편하고 둥근 시간의 띠 그 어디쯤 산재해 있을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의 아버지의…… 어머니인 미립자들, 먼지는 먼지를 혼돈은 혼돈을 음악은 음악을 파동은 파동을 부르고 모으고 흩어지고 영원한 허기로 결박되는 꿈, 을 생이라 불러도 되는 건가요? 우리 모두 이 세계의 뮤턴트, 지워진 길에서 길을 찾는 하나의 이미테이션, 이라 생각해본 적 없나요? 당신의 몸을 빠져나와 거리를 활보하는 퓨마의 영혼을, 또아리 틀고 있는 뱀의 적의를, 포르노의 밤에 대해서 이야기하진 말아요 그 모든 것들 위로 솟구치는 비명을, 말하고 싶은 거에요 쇤베르크의 불협화음에 대하여 클림트의 해체에 대하여 랭보의 파괴로서의 구원에 대하여....
투명한 벽에 갇힌 모든 영혼들에 대하여 수수억년 전 내장된 바람의 빛깔과 우리 피 속을 떠도는 갈망에 대하여 익명이며 불구인 그 필연에 대하여
말하고 싶은 거에요.
*빈 사교계의 여왕인 알마밀러와 헤어지기 전 코코슈카가 그린 그림의 제목.
'2011 젊은 시' (문학나무)에서
박명보 시인 / 벗꽃 지다
대개는 답신이 없는 편지였다
멀어진 날들에 봄 꽃 한 잎 부치는 날
-이게 다예요 변명처럼 아니, 길 끝의 비명처럼 벗꽃이 지고 자꾸만 그를 잡고 흔들어대던 바람의 우듬지는 제 안의 천공으로 길을 낸다
만개한 벗꽃나무 아래, 사람들은 떠나지 않는다 꽃 지고 주름진 검은 몸피 드러날 때쯤에야 그 상처 뒤로 하고 자리를 턴다
바람이 변주하는 봄의 소나타 낮은 음계로 날아오르는 결별의 화음앞에서
보내야 할 때 한 번도 아름다운 적 없었던 늑골의 허기를 누른다
점묘법으로 걸어오는 어둠 낡은 풍경을 찢고 나온 듯 뒤늦게 분주한 어린 꽃의 뺨을 저녁의 푸른 손이 감싸 쥔다
창백하게, 단단해지는 꽃향기 허공이 품은 씨앗이다
-『열린시학』2012,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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