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임상요 시인 / 아노미 상태 외 2편

파스칼바이런 2023. 4. 16. 05:00

임상요 시인 / 아노미 상태

 

 

 사과가 싫어 액자보다 싫어

 

 사과를 원했다 증거를 원했다 사과가 되기 위해 사과의 혀가 매뉴얼 없는 휴일을 원했다 사과는 오지 않고는 사과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탁자 아래 엎드린 똥개마냥 사과는 얼굴로 해야 하나

 

 꽉 끼는 의족같이 사라지지 않는 사과는 불편했다 경전 없는 사과를 위해 우산을 쓰고

 

 머릿속이 쾌적했다 패턴을 뒤집어도 같은 패턴이었다 사과가 되는 사과는 식별되지 않는 물질이었다 거품자석처럼 모래에 박혔다 허공이 훔친 사과를 돌려줄게

 

 새는 순서대로 익사할 것 같았다 농담은 중독성에 가깝다 사과는 밥이었다 사과는 콩콩 뛰었다

 

 이상한 서열의 감옥이었다

 

 사과의 구역으로 침엽수는 등이 따갑고 등이 부끄럽고 사과의 장벽이 여기 있었다 눈 마주칠 때마다 사과는 계속 사과는 남아돌았다

 

 사랑 따위 뭐라고 사랑을 고백한 손을 번쩍 들고

 

 묻지 않고 다그쳤다 먹은 것 다 토해내라 고문도 없이 사과를 주기적으로 요구했다 사과를 모조리 불러냈다

 

 사과에 갇혀 사과는 범죄 소굴 같았다

 


 

 

임상요 시인 / 큐브의 두개골

 

 

 두개골을 엎으며 돌았다 충고를 찢으며 돌았다

 불길한 깃발처럼 짓밟힌 초록은 벽의 두께로 자랐다 내가 있을 곳으로 문턱의 혀가 튕겨 나갔다

 이리 와,

 목이 조이는 기분으로 누구의 손을 잡을지 몰랐다 하얗게 질린 집의 골격이 어긋났다

 나는 피카소 그림 같았고 방정식처럼 뾰족하게 웃었다

 새는 몇 바퀴째 도는지 돌아설 자세가 걱정되고 시궁창 신발이 걱정되고

 메건 부모도 그랬고

 케니 부모도 그랬다

 아빠는 체면을 중시했다 추락과 혈액은 같은 경로였다 불길 속의 안부같이 핏줄 같은 것을 걷어찼다

 차가운 눈빛을 삼킬 때 내 몸은 작은 공 제멋대로 공

 아빠 넥타이를 매어도 볼품없는 건달

 이제부터 너는 신이야 덤벙대는 신 깨져도 피가 흐르지 않는 신

 건달같이 두개골을 차며 달렸다

 끝말잇기처럼 엄마 집에 행운이 있기를

 

 


 

 

임상요 시인 / 종소리는 삐딱했다

 

 

불쌍한 쇳덩어리라고 할머니는 중얼거렸다

 

니 애비는 안 온다, 이것아

 

낙숫물이 뇌리에 박혔다 숭숭 뚫린 마루를 달랠 수 없었다 돌의 개수에 따라 숨 고르는 것들의 구역이 생겼다

 

할머니 나는 착한 개가 될 수 있을까요 세 발로 뛰고 빙빙 회전밖에 모르고 간혹 송곳니 으르렁거리면 마른번개같이 코를 훌쩍거릴까

 

물 빠진 혼백처럼 뜨문뜨문 하기 싫은 말을 건넸다

 

불편한 사탕을 녹여 먹고 지루하기 전에 죽어버렸으면ⵈⵈ추운 쪽으로 배회하는 꿈이 생겼다 파랑 노랑 주근깨여

 

새벽이 되면 늑대 떼가 몰려올까요

거미는 온전히 내 것이 아닌 어긋난 놀이들뿐이고

 

집의 뿌리까지 풋내가 엉겨 붙었다 날것을 향해 다녀간 꿈들 춤을 휘젓고 할퀴는 놀이는 없고

 

귀신은 뭘 하나, 할머니는 너그럽지 않았다

 

-시집 『흐르는 나비 그리고 거짓말』 2022.

 

 


 

임상요 시인

강원 삼척 출생. 2017년 《시인동네》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흐르는 나비 그리고 거짓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