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언주 시인 / 처음인 양 외 2편
심언주 시인 / 처음인 양
풀밭에서 양들은 뭉치면 한 마리, 흩어지면 백 마리.
몰려다니는 양들 따라 바뀌는 풀밭의 지도.
양은 처음 보아요, 딸은 토끼띠, 벨기에로 향하는 기차 밖으로 소도 말도 양도 보이는데, 소나 말은 알겠는데, 양은 처음 본다고 딸이 말합니다. 양털 이불도 덮어주고, 양떼구름도 보여줬는데 딸은 토끼띠, 나는 호랑이띠, 양을 그려보긴 했는데, 양을 세어보긴 했는데……
엄마, 양은 처음 보아요.
처음이라 말하는 순간 처음은 사라집니다. 양이라 말하는 순간 양은 사라집니다.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양이 풀을 뜯습니다.
양양에도 대관령에도 딸을 데리고 갔는데, 양떼 목장에 가긴 갔는데 양이 사라진 풀밭에서 눈썰매만 탔습니다. 갈대를 뭉쳐놓은 듯 몰려다니는 양은 안 보여주고, 새하얀 양만 그리게 했습니다. 번제를 올리느라 화면에서 양이 피를 뿜을 때 딸의 눈을 가렸던 것 같습니다. 그러고 보니 양은 안 보여주고 양 주변만 맴돌게 했습니다.
심언주 시인 / 다음 도착지는 암암리입니다
까마귀가 오고 까치가 가는 곳 까마귀들이 씨앗처럼 뿌려지는 곳 걸어다니는 곳마다 어둠이 찍히는 곳
비행기가 밑줄을 그으며 지나가는 곳 사방이 어둠이어서 말하는 그대로 마주보는 얼굴에 타이핑되는 곳 날개 그림에 몸통만 밀어넣으면 천사가 되는 곳, 오래 기다려도 날개가 펴지지 않는 곳
이곳 사람들과 손만 잡아도 어둠이 거래되는 곳 잉크를 먹고 잉크로 목욕하는 곳 눈물이 얼룩으로 번지는 곳 핼쑥해지는 곳
암암리라 써놓으면 사방이 어두워지고
밤바다가 고요한 도로 같습니다
낮엔 해안을 빙 돌아 당신에게 갔는데 이 밤엔 머뭇거리지 않고 당신에게 도달하겠네요
암암리라 써놓고는 고요에 묻힐까 두렵습니다
빙하가 녹은 후에나 발견되는 고요의 흔적
단단해진 고요에 불을 지피면 고요 주변을 서성이던 소란도 함께 타고 고요의 부스러기가 날아갑니다
암암리라 써놓아서일까요
자주 촛불을 들게 되고 암암리라는 창문 앞까지 환해져 밤잠을 설칩니다
일 초마다 눈을 깜빡이고, 일 초마다 줄어들면서 촛불은 어둠에 둘러싸인다는 걸 알기나 할까요
잠들기 전 머리맡 종이를 당겨 글씨 위에 글씨를 씁니다
헝클어진 생각은 봉두난발이지만
아무리 검게 칠해도 빈틈을 비집고 별이 뜹니다
아맘니, 아맘니, 입술 부딪히며
암암리에는 밤새 덜 마른 생각이 반짝거립니다
심언주 시인 / 꽃병
당신의 긴 목을 가파르게 오르는 병. 꽃에 다다르는 병
생각이 무거워져 당신은 곧 부러질 것이다
들리지 않을 때까지 목을 조이고 볼 수 없을 때까지
무거운 당신의 생각을 떠안고 풍선이 날아간다.
불룩한 꽃병.
온종일 쓰다듬어도 당신 얼굴이 생각나지 않는 병.
파라솔을 접고 멍하니 풀밭에 서 있는 병.
이제 얼굴 뒤편으로 기분을 구겨 넣지 않아도 된다.
나의 토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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