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기화 시인 / 낙관 외 1편

파스칼바이런 2023. 5. 9. 05:00

김기화 시인 / 낙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세상이라는 도화지에 발도장이 찍힌 거래 바람을 가른 울음과 맞바꾼 족장이었다지 성별에 따라 변하지 않는 바코드를 신고 날마다 현관을 나섰던 거야 문을 통과하기 위한 문서를 타고 났지만 때때로 발가벗겨지고 찢기기도 했다는군 견고한 이력이 아무 소용없어 덩그마니 던져진 광장의 오후는 서로의 거리를 지켜봐야만 했지 반지하 푸른 가방은 어두운 우울로 채워졌고 불어난 체중은 더 깊은 지하로 끙끙 들어앉았어 발도장이여 제발 왈츠로 걷게 해주세요 모자를 쓰고 벗을 때마다 주문처럼 중얼거렸던 현관의 기억, 탈출의 통로인 줄 알았던 그곳이 서서히 낯설어졌어 철컥 뒤통수를 환청이 휘감고 있을 때 꿈틀거리는 서곡처럼 택배가 왔어 문을 연 순간 내 무너진 투지가 햇살을 만난 순간이었지 핏기 없는 허연 빛깔의 익숙한 눈동자는 바로 나였던 거야 우물에 갇혀 있던 정지된 모습을 들어 올린 건 아주 작은 방문이었어 친절한 음악이 흐르고 시시詩詩한 사계절이 지났던가 다시 시작하게 된 타협의 눈부신 날, 그대 문을 열어야겠어

 

『시에티카』 2020-상반기호 <시에티카 시인/ 작품론>에서

 

 


 

 

김기화 시인 / 호명

 

 

 선생님, 제발 내 이름을 부르지 마세요 냉장고와 에어컨 속의 냉매는 어려워요 과학 시간이 나는 늘 지루했다 해찰을 하며 연애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수업시간마다 내 이름 기화(基花)는 기화(氣化)로 호명되었다 100˚C에서 1그램의 열량은 540cal 정확한 화학적 기화(氣化)열은 5화39.8cal 과학 시간의 공기는 나를 실험하듯 무겁고 붉게 왔다 알코올 솜으로 엉덩이를 문지르면 아세톤으로 매니큐어를 지우다 보면 수분이 증발하면서 시원해지는 현상을, 선생님의 목소리는 시간이 갈수록 냉기에서 온기로 순환이 되었다 지구과학 수업은 내게 몽롱한 스펙트럼으로 왔고 나는 연애편지를 계속 이어갔다 선생님, 저는 과학자가 꿈이 아니에요 이방인이 된 나는 종종 나만의 계곡 같은 책갈피에 코를 묻었다 연애편지는 이어쓰기를 멈추지 않았다 빨랫줄에 널린 옷가지들을 설명하는 선생님 나는 눈부신 햇살에 외눈박이로 걸려 있었다 햇살에 바람에 화학적 작용에 사라진 물무늬들, 사라지는 것들 속에서 내 이름이 하얗게 기화(氣化)되었다 선생님, 머리를 쥐어짜도 외워지지 않는 화학 기호에 머리가 아파요 무심코 연애편지를 접어 종이비행기를 날렸다 라이트 형제를 생각할 즈음 수업을 마치는 종이 울렸고 문장의 마침표를 찍을 때는 기발한 발견에 무릎을 칠 때가 있다 사전 속 단어놀이에 빠져 비행의 날개를 펼치던 나는 새로운 단어에 시선이 멎었다 또 다른 기화(奇貨)를 만난 것이다 '진귀한 재물이나 보배'라는 새 이름에 눈꺼풀이 번쩍 뜨였다 중학교 때 과학 시간에 가장 빛났던 내 이름은 기화(基花)

 

- <시에> 2022, 가을호

 

 


 

김기화 시인

충북 청주 출생. 2010년 《시에》 봄호를 통해 등단. 시집으로 『아메바의 춤』이 있음. 시에 문학회 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