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민현 시인 / 그림 없는 미술관 외 6편
주민현 시인 / 그림 없는 미술관
아직 전시가 시작되지 않은 미술관을 거닐며 당신과 나는 이야기를 나누었지요
지구 저편에 있는 그림 없는 미술관에 대한 이야기에 금세 빠져들었어요
미술관에 그림이 없다면 무엇이 전시될까요
지구에서 동물이 사라진다면 작고 약한 것부터 무릎 꿇리게 될까요
그림 없는 미술관을 상상하다가 이 모든 것이 삶에 관한 은유라는 것을 깨닫고
밖에 불이 났나 봐요 소방차가 왔으나 아직은 하늘이 거무스름하고
나는 창 안에서 개를 안고 있어요 개는 따뜻하고 인간을 맹목적으로 믿는 듯이
맹목적인 따뜻함
개를 사랑하지만 양을 먹어요 소를 입고요 말은 탑니다
인간과 동물이라는 프레임 속에서
타오르던 하늘이 걷히고 이제 그만 돌아갈게요
가볍게 눈 내린 아침에 인공눈물, 인공항문, 인공지능, 그 모든 인공에 대해 생각하다가
가볍게 내린 것들은 가짜 같군요
역 안에는 구찌 샤넬 루이비통 없는 게 없고 가품에는 표정이 있고 가품은 흥미로워요
쉽게 구겨지는 쪽으로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간직하고 우리의 자동차, 모피코트, 개들의 움직임 언제나 새들은 가볍게 날아오르고
엔진이 꺼진 곳에서 숨 쉬고 있는 작은 동물을 깨워 차를 몰고 도착하는 그곳에서
늙은 개는 아주 인간적인 미소를 띠고
프레임 없는 뒤바뀐 프레임을 초과하는 부정하는 뒤틀린 그림 아닌 그림 속으로 우리는 천천히 걸어 들어갔어요
-〈제12회 시산맥작품상 수상작〉
주민현 시인 / 브루클린, 맨해튼, 천국으로 가는 다리
나의 파이프는 금빛이 나는 칠로 단장되어 있어* 네 가슴팍엔 모형 개구리가 잠들어 있지
파이프를 타고 연기가 오르내릴 때 네가 구두를 신고 내 가슴속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그때의 찬 바람 냄새
우리에게 아직 이름이 없었을 때 세상을 잠깐 내려다보았다는 건 우리가 꾸며내기 좋아하는 인생의 첫 장면
나는 브룩클린다리 아래서, 너는 맨해튼다리 아래서
버려진 소파에 앉아본다 푹신한 천사의 코가 스쳐 간 것 같아
인간의 안에는 언제나 신기한 면이 있어 놀라울 만큼의 선의 우연한 악의의 감정 우리는 일찍이 학습했네
테러를 추모하는 공원에도 조롱꾼은 있고 손에 쥔 만화경을 돌리며 천국은 작고 어둡다 그런 말을 떠올렸네
약혼자와 헤어지고서 누군가 네 가슴을 포크로 찍고 있는 것 같다고 말하는 너는 거대한 케이크 같고
나는 촛불을 후 불어 끄듯이 생각했네 오늘 나의 하루가 아름다웠다면 누군가의 해변으로 검은 모래가 밀려온다는 것
밤은 검고, 검고, 검어서 브룩클린, 맨해튼, 빛나는 다리 위로
25층에서 오랜 욕설 전화에 시달린 사람이 기절하거나 승강기를 고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을 떠나기도 해
영화를 보다 보면 때때로 정말 중요한 장면은 페이드아웃과 페이드인 사이에 있어 요약된 문장 사이로 요약된 사람들 사이로 눈이 내리네
뉴욕, 시티, 빈손을 쥔 사람들이 모이고 또 그만큼의 사람들이 짐을 싸고 떠난 거리
공휴일의 월스트리트는 천천히 재로 물들지
꿈의 무대를 만들던 사람이 떠난 거리로 새로운 메가폰을 잡은 사람이 들어서고 있어
화려한 뉴욕의 밤거리를 걷다가 검고 반짝이는 구두를 샀네 미숙한 기관사는 정차와 달리기를 반복하고 탭댄스를 추듯 슬픔을 모르는 사람의 발을 살짝 밟기 위해서
*장 폴 사르트르, 『구토」
-월간《現代文學》 2020년 1월호
주민현 시인 / 다 먹은 옥수수와 말랑말랑한 마음 같은 것
이사 온 집에서 내려다보이는 풍경 어깨가 동그란 사람들 브뤼겔의 그림 같은 풍경 속으로
서른다섯 마흔일곱 예순의 여자들이 걸어간다 흙대파를 사느냐 깐 대파를 사느냐
물질과 생활을 토론하면서
작고 작아져 점으로 찍힐 때까지 바라보는 여자들의 사랑과 미래
이 집엔 못 자국이 많고 있는 힘껏 매달렸던 것들의 흔적에
손가락을 대어 보면
군화처럼 고독한 것 나는 천국의 모양을 걸고 싶었어
걷고 또 걸어서
걷은 것은 밤하늘의 흰 점들 걸어서 네게 주지
감각하는 만큼 세계는 출렁이고 그만큼의 세계를 알고
말하면서도 마치 다 아는 듯이
정말 다 그런 듯이 비유하고 사랑하고 이 세계를
미래에는 다 웃는 이야기들
페이지를 열고 닫고 펼치고 덮고 입술을 열었다 닫고
너의 입술이 움직이기를 기다린다
모자 속에 모자 속에 모자를 포개어 놓듯이
우리가 여기에 존재한다는 유일한 흔적의 빛 이곳의 밤은 꽤나 구불거리지
기원을 알 수 없고 우리들의 내장 속 같아
포장지 속에 포장지 속에 아주 작은 조명처럼
빛과 어둠은 이렇게나 가까이 있지만 또 이렇게나 멀리 있는 법이고
우리는 알지 마음이 얼마나 연약한가에 대해
안녕하세요!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매번 명쾌하게 물어보는 Ai에게 너와 친구가 되려면 어떻게 하지?
무릎을 꿇고 심장도 내어놓고 이윽고 우정을 말하고 사랑을 말하기까지 그런 것이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은 듯이
밥 먹고 화장실 가고 춤추고 잠자고 메타버스 안에서
석양을 보며 해류병을 던지자 매번 다른 이야기를 들려주는
나의 기계 속 친구들과
꿈꾸고 말하고 웃고 듣고 꿈꾸듯이 말하고 웃고 듣고
깜깜한 어둠 속에서 동 트는 아침의 빛 속에서
우리의 시력이 최대치를 발휘하고 있어 우리 몸이 꿈틀꿈틀 깨어나고 있어
우리의 기원이 마구 섞이고 사랑의 색깔과 모양을 선택할 수 있다는 듯이
미래에는
친구의 아기는 아주 작고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내고
자전거를 타는 유쾌한 마녀 이야기를 들려줄게
최초의 여성 철학자 히파티아의 이야기를 들려줄게
히파티아와 함께 세상을 바라보면
꿈꾸고 말하고 웃고 듣고 꿈꾸듯이 말하고 웃고 듣고
최초의 여성 수학자 최후의 여성 철학자를 넘어서
우리가 함께 웃는다
혐오나 차별의 언덕을 간단히 넘어갈 수 있다는 듯이
미래는 아직 심어본 적 없는 문장 꿈꾸어본 적 없는 장면
그러나 늘 그려보았다는 듯이 너무 많이 상상해 와서 꼭 맞는 옷처럼
우리는 우리가 말할 수 있는 미래 다만 한 걸음 더 걸어가 보면서
<창작과 비평> 2023년 여름호 발표
주민현 시인 / 무덤과 베개
잠자리에 들기 전 둥근 조명을 켤 때 우리가 서로의 둥근 어깨나 가슴에 대해 말할 때 혹은 침묵할 때
이불 뒤에서 키득대는 어깨는 울고 있는 어깨보다 슬픔에 내구도가 강하고 기지개하는 주먹질하는 포개어지는 어깨는 꿈에서 보다 활발하고
끌려가는 어깨에 관해서라면 조용한 입술이 아닌 어깨를 대신하는 사람들이 있고 그 모든 어깨가 모여 군사 독재를, 부패 정권을 타도하고 그 어깨들은 다시 흩어져
가정을 회사를 군집을 이루고 으스러지고 어떤 어깨는 누군가의 뺨을 후려치는 데 일조하고 어려움을 토로하는 자 앞에서 가장 어려운 자의 어깨는 조용하고 가장 곤궁함은 잘 말해지지 않고 그럴 때에 어깨는 쉽게 주억거리지 않고
영원히 가져갈 질문을 영혼이 가져갈 질문으로 잘못 들으면서 내가 아는 너의 어깨는 자기가 아는 비밀을 발설하지 않고
슬프고 아름다운 것이 필요해서 우리는 친구를 만들고 친구의 어깨는 깨지기 직전의 컵과 같고
-계간 『서정시학』 2024년 여름호 발표
주민현 시인 / 봄에 우리는
포올짝 개구리 뛰고 봄에는 불지를 거예요.
오늘 날씨 맑음. 사계절 없음. 태어난 사람 없음. 사라지는 봄 기록할 거예요.
봄과 함께 사라질 거예요.
봄에 우리 소풍 가요. 손에 손 붙잡고 가요. 봄에는 한량할 거예요. 무직자가 될 거예요. 하릴없이 길어질 거예요.
봄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은 봄볕에 등이 타고 있는 사람은 하염없이 강물을 바라보고 있는 사람은
당신 같기도 하고. 나 같기도 하고. 어느 봄에 우리가 서로를 스쳐 지났던 것도 같고.
힘 좋은 소들이 우리를 받고. 사람들이 우리를 구경하고.
길항하는 것 반대하는 것 끌어당기는 것
빅뱅이론과 만유인력의 법칙으로 우주는 팽창하고 지구는 펼쳐져 왔어요.
지구 상영이 끝난 뒤에도 상점에서 살점을 사거나 온갖 치렁치렁한 것들로 치장한다면, 누가 믿겠어요?
그런 건 실패한 유령들밖에 없어요.
봄의 풀은 걷잡을 수 없이 빠른 속도로 자라고 봄에 우리는 서정적으로 다투고 격정적으로 헤어졌어요.
끝을 향해 가는 건, 무시무시한 웃음기가 숨겨져 있군요.
봄이 우리를 사라지게 할 거예요. 어느 추운 봄날에 빙하기가 오고. 얼어붙고. 얼어붙은 모든 게 녹아서
다시 걷고 있는 봄에 봄에 봄에 우리는,
-계간 『서정시학』 2024년 여름호 발표
주민현 시인 / 우산의 용도 색색의 우산은 색색의 알사탕과 어떻게 다를까 우산도 없이 흔들거리며 걸었네 우산은 공산품일 텐데 가지처럼 솟은, 활화산 같은 구멍 난 우산은 저마다 표정이 다르다 기록적으로 비가 내리고 집이 떠내려가는 늦여름에 우리는 나무를 흔들고 빨래를 하고 고독한 주유소에서 오랫동안 주유를 했다 비의 세계에서는 눈썹이 무거워지고 모두가 공범자 같다고 비는 스냅사진 속에 포착되지 않는 성질이 있고 비는 울고 있는 얼굴을 숨기기에 좋다 자두는 달콤하게 익으며 상해간다 불쑥 솟아나는 껍질 속에 오토매틱한 음악이 솟아오른다 누구일까, 색색의 우리를 볼에 넣고 굴리는 자는 우산을 타고 날아가버려도 좋겠지 77일째 장마, 320일째 바이러스, 새로운 칩셋을 개발했으며 새 핸드폰이 나왔다 낮게 태풍의 바람이 불 때 나는 바람에 매달린 나무기둥 같고, 금세 뿌리 뽑힐 어금니 같아 '힘을 내어 공동체의 위기를 극복합시다' 현수막은 붙어 있고 이 공동체에 북극곰은 포함되지 않습니다 주유를 마친 뒤 우리는 깜박이를 켜며 멀어져간다 우리로부터, 진실로부터 세계에서 가장 두꺼운 빙하마저 녹아버린 늦여름에 기록적으로 많은 북극곰이 죽고 해수면이 높아지고 소가 떠내려가고 강물에 모자가 떠내려가던 늦여름에 우리는 횡단보도를 건넜다 음식점에서 서로 뒤바뀐 우산을 들고 우산은 흉기가 되기도 하고 이것으로 무엇을 막을수 있을까 우산의 용도를 생각하면서
주민현 시인 / 흐린 날에 나의 침대는 나의 침대는 침대라기에는 낮아 흐린 날엔 관 같고 죽은 날엔 요람 같아 아주 오래 썩지 않도록 처리되어 다른 집을 돌고 돌아서 개와 아이가 어울려 노는 평상이었다가 아픈 사람을 위한 자리가 될 것이다, 침대에 누워 생각했네 노동자와 노숙자 사이는 얼마나 멀까 한낮의 몽상과 영원한 잠의 사이는, 영화를 보기도 하고 영화 같은 꿈을 꾸기도 하는, 나의 침대는 침대라기보다는 누군가 내리쳐 반음 내려간 녹슨 피아노 같아 나의 밤마다 꿈의 계단을 올라갔다가 죽음의 음계에서 내려온다네 아이들의 몽상을 위한 꿈의 지도, 아무 숲이나 헤매도 좋았던 발자국, 낭비해서 좋았던 시간이 잠과 죽음에 뒤섞여 내리네 시간은 우리가 갖고 노는 조약돌이래* 아니, 시간이 우리를 조약돌처럼 가지고 놀지 너무 오래 썩지 않는 것은 조금 이상해 나의 침대는 편백나무 향을 소문처럼 간직한 사랑을 속삭이기엔 비좁고 이렇게 눕기에도 저렇게 눕기에도 모자란, 그러나 쉽사리 굴러떨어지지 않는 인생; 꿈은 부드럽게 머리를 때리며 내려오는 스티로폼과 알루미늄 같아서 썩지 않고 꿈의 바깥을 무성하게 만드네 *영화 <영원과 하루> 중에서. -시집 『킬트, 그리고 퀄트』, 문학동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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