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 / 눈물 외 5편
도종환 시인 / 눈물
눈물이 하는 말을 들어라 네가 아픔으로 사무칠 때 눈물이 조그맣게 속삭이던 말을 잊지 마라 눈물이 네 얼굴에 쓴 젖은 글씨를 잊지 마라 눈물은 네가 정직할 때 너를 찾아왔었다 네 마음의 우물에서 가장 차가운 것을 퍼올려 너를 위로하고 너를 씻겨주었다 네 눈물을 기억하라 눈물이 네게 고백하던 말의 그 맑은 것을 잊지 마라
도종환 시인 / 다시 오는 봄
햇빛이 너무 맑아 눈물 납니다
살아 있구나 느끼니 눈물 납니다
기러기떼 열 지어 북으로 가고
길섶에 풀들도 돌아오는데
당신은 가고 그리움만 남아서가 아닙니다
이렇게 살아 있구나 생각하니 눈물 납니다
도종환 시인 / 억새
저녁 호수의 물빛이 억새풀빛인걸 보니 가을도 깊었습니다. 가을이 깊어지면 어머니, 억새풀밖에 마음 둘 데가 없습니다. 억새들도 이젠 그런 내 맘을 아는지 잔잔한 가을 햇살을 따서 하나씩 들판에 뿌리며 내 뒤를 따라오거나 고갯마루에 먼저 와 여린 손을 흔듭니다. 저도 가벼운 몸 하나로 서서 함께 흔들리는 이런 저녁이면 어머니 당신 생각이 간절합니다. 억새풀처럼 평생을 잔잔한 몸짓으로 사신 어머니, 올 가을 이 고개를 넘으면 이제 저는 많은 것을 내려놓고 저무는 길을 향해 걸어 내려가려 합니다 세상을 불빛과는 조금 거리를 둔 곳으로 가고자 합니다. 가진 것이 많지 않고 힘이 넘치는 자리에 앉아 본 적이 없는지라 어머니를 크게 기쁘게 해드리지 못하였지만 제가 가슴 아파하는 것은 어머니의 평범한 소망을 채워드리지 못한 점입니다. 험한 일 겪지 않고 마음 편하고 화목하게만 살아달라는 소망 아프지 말고 아이들 잘 키우고 남에게 엄한 소리 듣지 말고 살면 된다는 소박한 바램 그중 어느 하나도 들어드리지 못하였습니다. 험한 길을 택해 걸었기 때문에 내가 밟은 벼룻길 자갈돌이 어머니 가슴으로 떨어지는 소리만 수없이 들어야 했습니다. 내가 드린 것은 어머니를 벌판 끝에 세워놓고 억새같이 떨게 만든 세월뿐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점점 사위어 가는데 다시 가을이 깊어지고 바람은 하루가 다르게 차가워져 우리가 넘어야 할 산 너머엔 벌써 겨울 그림자 서성댑니다. 오늘은 서쪽하늘도 억새풀밭을 이루어 하늘은 억새구름으로 가득합니다 하늘로 옮겨간 억새밭 사잇길로 어머니가 천천히 천천히 걸어가는 게 보입니다 고갯마루에 앉아 오래도록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는 동안 하늘에서도 억새풀이 바람에 날려 흩어집니다 반짝이며, 저무는 가을 햇살을 묻힌 채 잠깐씩 반짝이며 억새풀, 억새풀잎들이,
-<신생 2004년 봄호> 전망
도종환 시인 /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가지 않을 수 있는 고난의 길은 없었다 몇몇 길은 거쳐오지 않았어야 했고 또 어떤 길은 정말 발 디디고 싶지 않았지만 돌이켜보면 그 모든 길을 지나 지금 여기까지 온 것이다 한 번쯤은 꼭 다시 걸어보고픈 길도 있고 아직도 해거름마다 따라와 나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길도 있다 그 길 때문에 눈시울 젖을 때 많으면서도 내가 걷는 이 길 나서는 새벽이면 남모르게 외롭고 돌아오는 길마다 말하지 않은 쓸쓸한 그늘 짙게 있지만 내가 가지 않을 수 있는 길은 없었다 그 어떤 쓰라린 길도 내게 물어오지 않고 같이 온 길은 없었다 그 길이 내 앞에 운명처럼 패여있는 길이라면 더욱 가슴 아리고 그것이 내 발길이 데려온 것이라면 발등을 찍고 싶을 때 있지만 내 앞에 있던 모든 길들이 나를 지나 지금 내 속에서 나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오늘 아침엔 안개 무더기로 내려 길을 뭉턱 자르더니 저녁엔 헤쳐온 길 가득 나를 혼자 버려둔다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오늘 또 가지 않을 수 없던 길
도종환 시인 / 풍경
이름 없는 언덕에 기대어 한 세월 살았네 한 해에 절반쯤은 황량한 풍경과 살았네
꽃은 왔다가 순식간에 가버리고 특별할 게 없는 날이 오래 곁에 있었네
너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풍경을 견딜 수 있었을까
특별하지 않은 세월을 특별히 사랑하지 않았다면
저렇게 많은 들꽃 중에 한 송이 꽃일 뿐인 너를 깊이 사랑하지 않았다면
도종환 시인 / 새벽을 기다리며
검푸른 하늘 위로 싸아하게 별들이 빛나고 온 들을 서리가 하얗게 덮는 동안 나는 잠이 오지 않았다. 날이 밝으면 밤새도록 서리에 덮인 들길을 걸어 고개 하나를 또 넘어야 한다. 가시숲 헤치고 잡목수풀 지나 산 하나를 넘어야 한다. 아직 길이 끝나지 않은 저 숲에는 녹슨 철망도 있다 하고 발을 붙드는 시린 계곡물과 천길 벼랑도 있다 한다. 잠 못 드는 이 밤 산짐승 울음소리가 가까이에 들리고 어쩌면 겨울이 길어 바람 또한 질기게 살을 때리며 뒤를 따라오기도 할 것이다. 눈물로 가야 할 고난의 새벽이 가까워오는 동안 이 길의 첫발을 우리로 택하여 걷게 하신 뜻을 생각했다. 나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을 함께 떠나기로 한 벗들을 생각했다. 어찌하여 우리가 첫새벽을 택해 묵묵히 이 길을 떠났는지 어찌하여 우리의 싸움이 사랑에서 비롯되었는지 우리가 떠나고 난 뒤 남겨진 발자국들이 길이 되어 이 땅에 문신처럼 새겨진 뒷날에는 꼭 기억케 될 것임을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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