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금시아 시인 / 숨은 말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6. 17. 20:28

금시아 시인 / 숨은 말

 

 

세상에서 잃어버린 말 하나 있다

좀처럼 낯설어지지 않는

아무리 서둘러도 닿지 않는 말 하나,

외출 할 때나 집을 나설 때면 꼭

문밖에서 먼저 기다리는 말이 있었다 항상,

먼저 문을 열고 내가 뒤늦게 문을 닫았던 기억이 있다

문밖에서 종종거리다 다그치면

단추 구멍이 어긋나거나 화장이 삐뚤어지거나

미처 잠그지 못한 밸브가 있었다

팔짱 끼듯 천연덕스럽게 친절한 말

입술 끝에서 하루 종일 제일 바쁜 말의 안쪽 말

성격이 급해 쉬 붉어지는 말의 반대쪽 말

외출 준비를 하다

문밖에 귀를 기울일 때가 있다

부르는 소리 채근하는 소리 없는데도 살짝

문을 열어놓는다

어떤 말이 종종거리는 것처럼 서두른다

그럴 때는 입술이 삐뚤어지고 앞섶 길이가 어긋나고

점검하던 밸브 하나 여전히 숨고는 한다

너무 멀어 들리지 않는 환청처럼

잠깐 돌아보게 하는 말

머뭇거림이 있어 성급할 때마다 바쁠 때마다

문득 나를 붙잡는 말

현관문 앞 덩그렇게 비어있는

얼른 와,의 다른 세상의 말 하나

천천히 와.

 

 


 

 

금시아 시인 / 봄의 수염

 

 

낭창낭창 어린 고양이가

아지랑이와 실랑이를 하고 있다

실 뭉치같이 호기심 빠져나오고 있는 고양이의 몸짓,

팔딱팔딱 숨차다

 

지하의 환기창에서 빠져나오는 열선들은

앞발로 잡으려는 봄의 줄기들

재바른 절지동물이지

아주 작은 고양이는

아침 봄 나절 뜀박질을 해 대더니

네 발을 늘어뜨리고 문턱에 잠들어 있다

 

꼼지락거리는 봄날을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아기고양이

 

제 입술에

연약한 발톱으로 할퀸 공중이 붉게 물들어 있고

제 주둥이에 몇 가닥

아지랑이가 붙어 있는 것도 모른 채

낮잠을 잔다

단꿈의 흔적 점점 아롱거린다

 

꼬리를 살랑살랑, 잠꼬대를 하는 게지

엄마의 젖을 물고

아지랑이는

아기 고양이의 수염이 되는 거지

 

-시집 『툭,의 녹취록』 <시와표현>

 

 


 

 

금시아 시인 / 대중

 

 

 할아버지의 일과日課는

 저수지와 고래실을 짚어보시는 일로 시작되었다

 

 눈대중과 손대중으로 아스라이 하루를 재보며 꼬박꼬박 삼시 세끼를 지켜온 것은 다 할아버지의 대중 법 때문이었다

 

 어느 맘 때였는지,

 

 새벽 저수지의 물을 대중해보고 할아버지는 그 저수지에 뛰어든 익사자를 알아맞히기도 했는데

 

 물의 것이 아닌 물체를 알아맞히는 대중 법,

 그렇다면 익사의 수위란

 사람을 이해하는 대중과 동량이 아닐까

 

 혹자는 능통한 대중의 초과를 경고했지만 할아버지 손등에서 찰박거리는 시간의 흘수선은 부실한 치아와 까칠한 입맛으로도 호락호락 가늠되지 않았던 것 같다

 

 최첨단 IT산업이 들어오고 구름 도시가 생겼다

 수몰된 저수지와 고래실의 흘수선은 표류되었다

 

 흩어지는 물방울도 이문이라고 그들은 우겼지만,눈과 손으로 수치를 대중하던 할아버지는 사이버를 사이비라 했다

 

 그리고, 대중은 돌아가셨다

 

 


 

 

금시아 시인 / 공지천, 공지어, 그리고

 

 

늙은 어머니의 휠체어를 밀며

공지천을 들고나는 늙은 아들이 있다

 

저 물고기는 언제 하늘로 올라간다니

저 물고기는 공지천 명물이라 어딜 못 가요

 

오색야경에 꼬리지느러미 더욱 파닥이며

어디론가 비상을 꿈꾸는

무지갯빛 지푸라기 공지어,

 

세상 이치 훤히 꿰고 있는

노인도老人圖뒤로 공지천 조명이 환하다

 

아들의 채근과 어머니의 졸음

점점 공지어를 닮아간다

 

 


 

 

금시아 시인 / 노 젓듯 찻잔을 젓는다

강기슭 고요하다

난파선처럼 기울어진 채 정박해 있다

그림인 듯 그림자인 듯

어디선가 흘러온 배 한 척,

 

빛바랜 벽에는 해바라기들 끝이 없고

오후의 생각들 창가 테이블에 앉아

턱을 괴고 졸고 있는

 

순장자들의 은신처

후미진 강가 카페 하나

 

바람은 쉴 곳에서 적막하고

고인 빗방울은 고요 속으로 튕겨 나가는데

 

문득 외진 느티나무 그늘이거나

수소문 끝에 찾아간 어느 병실이거나

이방인의 천적들 불협화음처럼 범람하고 있다

 

졸린 문을 활짝 열면 풍경들 두근거릴까

그림자가 그림자를 지우기도

또 다른 한 생명을 선물하기도 할까

 

카페 은신처,

눈먼 감정의 두려움과 마주 앉아

노 젓듯 빈 찻잔을 젓는다

 

떠도는 그리움만 세상 깊어

제목 없는 그림일기를 홀짝거린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0월호 발표

 

 


 

 

금시아 시인 / π지대

 

 

봄비는 누구를 적셨을까

 

빗방울들의 파동에 쫑긋쫑긋 뿔이 돋는 대지

꽃들의 비무장에

강력한 시샘을 날리는 꽃샘추위도

결국 제 갈 길로 체념을 꺾는다

 

봄비를 마신 아침 해가

기울어져 있는 생명들에게 복약지침을 내리는 아침

병원 로비의 화분들이 성화다

말라가는 웅덩이의 물고기처럼 겨울 햇살 파닥거린다

아지랑이는 아마 하지의 깊은 잠속으로 들 것 같다

 

뒤죽박죽 순서 없는 소용돌이

꼭 쥔 주먹을 풀어도 눈물 속의 문신들 점점 새파래진다

손뼉을 쳐 봐

부싯돌처럼 손바닥을 비벼 체온을 올려 봐

시간의 매듭은 봄비의 표적이다

표적 밖에서 버둥거리는 꽃잎처럼

몇 페이지 훌쩍 넘어가 버린 호흡이 잠잠하다

나뭇가지 끝에서 박제되는 꽃잎들

 

중환자실 의자들은 온종일 안절부절

닫힌 문이 남발하는 말을 분류한다

계기판의 들리지 않는 표정과 음성의 농도를 판독해

제각각 방향을 지정한다

겨울 어디쯤에서 온 울음이 씹힌다

세상의 질문이 마감된다

 

"곰 세 마리가 한집에 있어 엄마 곰 아빠 곰 애기 곰......"

중환자실 앞에서 아이가 팔짝팔짝 노래를 한다

중환자실을 나온 죽음이 덜컹,

아이를 스치고 간다

노래가 기우뚱 고음으로 바뀐다

 

 


 

 

금시아 시인 / 제발 내버려 두렴, 나의 우주를

 

징조도 없이 어느 날 문득

엉뚱한 목표치에 도달하듯 일상이 급변하면 환경은 재빨리 자신의 경계를 재설정한다지

낯선 일상의 등장은 순식간에 익숙함을 제지하거나 편안함을 격리하고 말지

간섭하지 않으며 침범하지 않는 경계

자연의 거리 두기는,

생성보다 더 먼저 존중되는 규칙이었다지

타자끼리 제 영역을 확장해 가면서도 어떤 견고한 고통보다 더 먼저 성장하고, 부피와 질량을 알 수 없는 생소한 슬픔과 외로움, 참을 수 없는 고통마저도 묽게 숙성시켜 버리고서는, 비로소 가장 작은 따듯함과 숭고함을 비추며 서로의 눈물 닦아주는

저 자연의 우주는, 고독한 거리 두기에서 출발한 거라지

얼마만큼 시행착오를 거듭해야 얼마만큼 자연스러워야 더 깊이 더 많이 고독해질까

제발 내버려 두렴, 나의 우주를

 

 


 

금시아 시인

1961년 광주에서 출생. (본명: 김인숙) 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업. 강원대학교 대학원 스토리텔링학과를 수료. 2014년 《시와 표현》으로 등단. 시집 『고요한 세상의 쓸쓸함은 물밑 한 뼘 어디쯤일까』, 『입술을 줍다』, 『툭,의 녹취록』. 제3회 여성조선문학상 대상,제5회 강원문학 작품상, 제17회 김유정기억하기전국공모전 '시' 대상, 제14회 춘천문학상 수상. 한국시인협회, 한국문인협회, 한국카톨릭문인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