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연 시인 / 에덴의 기원 외 10편
이재연 시인 / 에덴의 기원 화사가 잘 감추어져 있는 오후에는 남쪽이 더 긴밀해지고 남쪽과는 어떤 이야기도 주고받을 수 있다는 입장입니다
불필요한 찔레꽃의 입장은 필요한 만큼 확장되고 때 지난 사람의 육성이 고요한 오후를 팽창 시키는 수변로를 순순히 지나가지만 누가 옆으로 지나간다는 걸 느낄 수 없는 남쪽입니다
앞서 가는 사람과 뒤에 오는 사람의 차이를 떠도는 것은 빛의 알갱이일 뿐입니다
얇고 투명한 비닐하우스 속에서 무럭무럭 자라나는 것은 훌러덩 벗어 버리면 그만인 단순한 열기에 불과합니다
식물은 저항하지 않았지만 저항하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 지구와 같은 입장으로 성장하고 무장하고 태연하게 꽃 피우고 꽃 버리고 뜨거워지는 쪽으로 산등성이를 그리지만
해가 순순히 넘어가는 산등성이는 아닙니다
늘어질 대로 늘어지는 것이 물의 입장이라고 하는 남쪽입니다 누가 말했습니다 여기 뱀이 있습니다
너무 고요해 소름이 돋습니다 입을 벌리고 있는 지구의 입장과 같습니다
찔레꽃은 향기의 주둔지이지만 무장할 필요가 없는 무논의 복판에서 바지를 둘둘 말아 올린 농부의 복장과 비슷하여 시간을 해제시킵니다
시간이 이래도 되는 건지 묻지는 않겠습니다
잠시도 쉬고 싶지 않는 것이 찔레꽃이 거부하는 입장인 것이 분명하여 묻습니다 여기 뱀이 있습니까
묵묵부답 이것만큼 위엄이 있는 대답도 없습니다 남쪽에서는 거부되는 답변이지만 어디에나 도사리고 있는 침묵은 위험합니다
차가운 기분이 길바닥을 쓰윽 지나갑니다
강의 꼬리를 놓치고 찾아 헤맸던 몽탄교도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태양이 흘러내리는 동안 우거진 들판, 끊임없이 새끼가 새끼를 낳는 들판 여기 뱀이 있습니까 2023년『파란』 가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진화
불꽃같은 너는 어둠 속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배가 홀쭉해져 짙은 풀숲으로 돌아간 후 다시 뒤돌아보지 않는다
그러나 밤은 뒤를 지우거나 뒤를 밟고 있다
언덕이 무너질 때까지 뒤는 돌아보지 않을 생각이다
앞으로 가도 뒤로 가도 이제 우리는 익명 더 멀어지고 점점 아프지 않게 될 것이고 영영 생각이 나지 않을 수도 있다
사실은 친구가 울었다 개가 달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다고 아주 오랜만에 창틀이 울었다
계간 『시인시대』 2024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아름다운 미래
한곳에 오래 앉아 있다 보면 부끄럽게 싹트는 사랑
너 외에 나 외에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아무도 보이지 않는 지금 커피를 마시다가 얼음을 가지고 놀아 입속의 얼음이 다 녹아 이제
태양이 식기를
뒤뚱뒤뚱 펭귄이 안정되기를 바라다 해수면이 높아지기까지 오십 년이면 충분하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 그 밖의 모든 것들
얼굴을 바꾸거나 성질이 이상해져 아름다운 미래를 가지고 집으로 돌아가기엔
마라탕집 앞에 서 있는 줄이 길다 우리는 너무 맵고 붉다
파란 물이 출렁이는 지도에는 바다가 없다
아직 어리거나 이미 아름다운 종족이 되어 버린
너 외에 나 외에
아무도 없는
그 눈 속에서 눈이 오고 얼음 속의 얼음이 녹고
태양은 섬을 가라앉힌다
계간 『시인시대』 2023년 겨울호 발표
이재연 시인 / 너무 많은 여름
이런 여름은 이제 시작에 불과해 바람이 왜 이렇게 많은 거야
작은 새가 바람과 별개가 아닌 여름의 다른 말이라고 생각하지 마 어디든 잠깐 앉았다 떠나는 새는 자유로울 거야 시작되었다 하면 끝나는 것이 여름이야
그동안의 여름은 여름도 아니야 달라졌다고 생각하지 마 그렇게 진행되어 온 거야 살아가는 일이 그래 새처럼 계절마다 다른 음계를 짚으며 자연의 악보를 읽다가 연꽃은 홀로 천 개의 잎을 피워 올리는 거지만
사라져 버린 커튼이 이유 없이 날리는 저택의 한여름 밤은 단물이 줄줄 흐르다가 뚝 그치는 과수원과 빗줄기 사이에서 파생하는 빛과 그늘의 협연이야
이번 생은 버려진 붉은 벽돌의 저택을 리모델링하는 꿈을 꾸다가 리조트로 달려가 완전한 휴가를 즐기는 것이라고는 말하지 마 이 여름이 끝날 무렵 비로소 휴가는 자유로울 거야
비가 멈추는 순간 은팔찌를 끼고 찰랑대다 여름 하고 눈 감으면 숲을 휘감고 부는 공중의 바람은 자연의 의지를 몰고 올 거야 아직 다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마
웹진 『공정한 시인의 사회』 2023년 8월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신과 아이
밤의 별과 함께 들판의 꽃은 향기롭지만 낮에는 어디로 갈지 몰랐다
어디로든 가야 했고 알고 있던 것들과 멀어지고 싶었다
텅 빈 운동장의 둘레는 계속 넓어지고 플라타너스는 두 팔로 다 안을 수 없게 되었다 무덤 속의 아이들은 하늘을 항해하고 있었다
멀구슬나무에서 종소리가 쏟아지는 저녁 들어 보려고 애썼지만 들리지 않았던 하늘의 목소리
아직 다 자라지 않은 겨울나무 가지 끝에 매달려 있던 적막과 아무도 지나가지 않은 흰 눈길까지도 다 어린 기도였던 그때
어머니는 불길을 다독이는 아궁이 앞에 있었고 신은 빨간 열매를 꺾던 그 숲에 있었다
계간 『사이펀』 2023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사라진 문명
자꾸 쳐다보면 나무는 터널이 되었다 터널이 된 나무 아래를 지나가는 사람들끼리 바둑을 두는 사이에 한 오백 년 지나간다 흑이든 백이든 벽돌은 늙어 가고 파헤쳐진 땅속에 노란 물 고이고 내 안에 당신 있다고 웃는 메시지처럼 뒤돌아보는 여기 털 깎은 푸들이 뒤를 따라온다 푸들의 주인이 푸들을 통제하고 규제하는 자유에 지쳐 다시 주인에게 돌아와 아양을 떨고 있는 나무 아래의 팽팽한 대립 한 발 한 발 천천히 뒤로 밀리다 호랑이 줄무늬를 한 승자 앞에서 슬그머니 사라지는 푸른 눈 검은 노래의 야옹 이른 저녁부터 늦은 밤까지 비가 내리고 아침이면 개여 사과 바나나 토마토 감자와 함께 동굴 벽화처럼 앉아 옥수수를 먹고 있는 사람들 속에는 에로스도 없고 주인공도 없다 매미 울음소리만 있다 맹렬히 일제히 울다 무성해져서 뒤돌아보는 여름 푸들이 따라온다 지그재그로 뒤를 따라온다 나무 속으로 나무가 사라지고 한 오백 년 사라지고 나무는 벽화가 되었다 벽화 속으로 바람이 흘러 가고 슬픔을 알고 싶다고 삶을 느끼고 싶다고 말하는 사람이 진짜 사람이 되어 슬퍼했더라는 전문이 발견되었다
계간 『인간과 문학』 2023년 가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하늘과 바람과 별
색이 다 사라진 강의 습지를 소리 내서 읽어야 합니다 읽을 때마다 달라지는 것은 바람의 감정이지만 강물은 속으로 읽는 것과 속으로 우는 것을 허락합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도 보이지 않아 물 속 깊이 자맥질해 들어간 청둥오리를 오래 기다립니다
곧 어두워질 텐데 쉽게 어두워지고 말텐데 나그네는 배 한척 묶여 있는 옛 나루터를 쉬이 지나가지 못합니다
한참을 기다리다 다시 물 밖으로 나온 청둥오리와 나눈 이 오랜 평화의 메시지를 늙은 병사처럼 뒤를 쫓아오던 검은 개가 물고 어디론가 사라집니다
흰 수건 눌러쓰고 마당귀에 조용히 앉아 벌레 먹은 팥알을 헤아리던 내 어머니의 한숨 같은 세월아
끝까지 홀로 있지 못하는 강변의 저 물새들 좀 보고 가소 꺼이꺼이 우는 저 물새들 좀 보고 가소
물새의 젖은 발목은 짧은 문장이어서 화려한 수사는 없습니다 그러나 소리내지 않고 읽는 것을 허락하지 않습니다 몽상가처럼 입 속에 바람을 가득 담고 읽어야 하는 계절은 물속에 있고 나는 물밖에 있습니다 희고 유연한 활자가 내 안에 있는 하늘과 바람과 별을 다 읽으며 지나가고 있습니다 -계간 『사이펀』 2024년 가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오늘도 다르지 않습니다 라일락 꽃잎을 뜯어 라일락 시럽을 만드는 동안에도 라일락꽃은 피어나는데 잠깐 비가 왔습니다 라일락과 장미와 양파와 자색 가지와 커다란 암탉을 다듬는 여인의 손톱 밑은 검게 변해 있습니다 여인의 손은 크고 공손했습니다
온실을 짓고 스토브를 만들고 선반을 만들었습니다 제라늄 화분은 선반 위에서 따로 또 서로 같이 놀게 했습니다. 마당을 뒹구는 개와 고양이는 서로를 공격했지만 아무도 다치지 않았습니다
암탉이 울 때마다 어디서든지 꽃은 꽃을 낳았습니다 들판을 가르며 흐르는 개울물은 은밀했고 명랑했습니다 시절 없이 핀 야생화를 똑똑 따서 투명주전자에 담은 후 뜨거운 물을 붓고 잠시 기다리는 동안 부풀어 오른 빵을 뜯으며 생기는 침묵은 잘 발효되어
식사는 단순하고 충분했습니다
초원 위에 흰 연기가 순하게 피어오르는 동안 농부들은 힘을 합쳐 다시 밀을 거두어들이고 대지를 가로질러가는 개울물에 손을 씻었습니다 긴 목을 뒤로 젖히고 하늘을 길게 올려다본 후 낟가리와 낟가리 사이로 걸음을 옮길 때
자작나무와 함께 겨울이 왔습니다 뚜벅뚜벅 흰 벌판을 걸어서 그가 오는 동안 남아있는 것 외에 것은 다 사라지고
화구 안에서 마른 나무의 목소리가 타닥타닥 서로 부딪치며 타오르고 있습니다 밖은 완전히 어두워지지 않고 흰옷 입은 천사는 나무의 밤을 지나가고 있습니다. -계간 『시산맥』 2024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모든 밤은 자신의 영혼을 기억하고 있다
한없이 끌려들어가는 눈길 밟으며 집으로 돌아가는 길 옛사랑은 나를 사랑했냐고 자꾸 물어보지만 좀 조용히 해다오 온 몸에 찬바람 묻혀 들어 온 어머니 꽁꽁 언 손 이불 속에 넣으면 세상이 비로소 평화로워 석류꽃 떨어지던 마당에 눈 내린다 붕대를 칭칭 감은 겨울 숲이 방 문 앞까지 다가와 문살 흔드는 십이월에는 라디오보다 어둠이 어슬렁거리는 골목을 더 사랑했다 대문을 활짝 열고 들어오는 낮보다 아무도 몰래 담을 훌쩍 넘어 들어온 밤의 영혼을 더 사랑했다 아무렴 밤은 몹시도 조용히 타오르는 불꽃 마을을 떠나는 혼 불의 꼬리처럼 포물선을 그으며 사랑은 먼 들녘으로 사라지고 사람보다 앞서서 사람에게서 먼저 떠나는 불을 며칠 전 동구 밖 전나무 우듬지 끝에서 봤다고 수군거리는 마고할머니들처럼 천지에 눈 내린다 생은 나를 사랑했냐고 자꾸 물어보려 하지만 술 취한 아버지를 세 번씩 열 번도 더 부인하고 흰 눈을 먹고 눈밭을 걸어가는 환한 밤의 성가여 이제 창문을 열어다오
-계간 『상상인』 2024년 봄호 발표
이재연 시인 / 범람
작년과 같은 것이 올해에도 다 살아있지는 않아 하늘가에 수국을 심고 붉은 흙을 꾹꾹 눌러주는 유월
더 이상 따라갈 수 없는 강물을 옆에 두고 지붕 낮은 집에 들어와 밥을 먹는다
나도 모르게 눈을 오래 맞춘 통유리 밖 흰 고양이 국도 쪽으로 사라져간다 저것 봐, 저것 봐 가만히 이곳을 떠나는 것이다 말없이 가는 것이다
떠날 것을 알고 난 후에도 강을 가로질러가는 다리가 더 길었으면 하는 오후였고 키 큰 나무를 다 덮을 듯 불어난 물 가까이 다가갔다 큰 물소리에 떠밀려 집으로는 돌아오고 싶지 않는 날이었다
손 놓고 손을 바라보기만 하던 여름은 외진 곳을 폐허로 만들기도 했지만 물속 깊이 잠긴 저지대는 언제나 스스로 살아남아야 한다는 것을 의심할 수 없었기 때문에
들판의 바람을 다 먹은 나무처럼 서 있다 조가 박힌 흰 밥을 먹는다 아직 형체가 살아있는 벌건 쏘가리를 다 먹고 남긴다
사방이 푸르기만 하여 숨어있기 좋은 유역 살과 뼈가 다 마른 후에야 헌신을 말하던 사람의 유물을 생각하며 사람 없는 곳을 찾아와 사람 없는 것에 취해 누가 울까봐, 휘어지는 강물소리 듣는다
이재연 시인 / 새와 공구와 스웨터
곧 가을이 왔다 눈이 올 무렵 양파를 썰다가 양파에 갇힌 눈물을 바라본다 눈물을 조금 생각하다가 자세를 바꾸고 이사를 했다
죽은 나무와 빈 화분과 공구가 담긴 상자와 액자를 버리고 익스프레스가 떠난 오후 주소를 옮긴다 오래된 주소와 낡은 스웨터를 헌옷 수거함에 버리고 온 후에도 하루 종일 창가에 앉아 어지러운 사물들을 잊고 새를 이해했다
한 마리, 두 마리, 세 마리, 세고 있는 동안 일부는 계보를 만들고 일부는 죽는다 나무는 흔들리고 새는 날아갔다 다시 왔다
나무이면서 나무가 아닌 것 같은 책장을 버리는 데에 짧은 숲의 시간이 필요했다
새에게 도달하려면 가로와 세로가 없는 허공이 필요했다 윤곽이 없는 트랙이 필요했다 트랙이 없는 곳이 필요했다 바람에게 필요한 트랙이 필요했다 밤 이었다 이름이 필요한 별이 필요했다 별을 만지면 같이 달려야 할 트랙이 필요했다 돌고 있다 어지러웠다 돌고 있다. 사실은
이사를 해도 살던 동네는 떠나지 못했다
이런 망설임으로 동사무소에 들렀다 조금 아는 직원이 나의 이름을 물었다 필요 없이 새의 이름을 신고하고 돌아오는 길에
가을을 이해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