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동호 시인 / 희미한 웃음 이미지 외 19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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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동호 시인 / 희미한 웃음 이미지
어둠 속에서 백지 같은 얼굴 하나 희미하게 웃다가 사라진다. 그 희미한 이미지가 오래 머리에 박혀 지워지지 않는다. 어린 시절 갑자기 죽거나 요절한 친구가 항상 떠나지 않고 어딘가에 마음속 깊이 자리 잡고 있다가 불쑥 살아나와 백지처럼 웃고 있는 것으로 생각한다. 백지는 항상 희미하고 낯선 얼굴로 새로운 고백을 강요한다. 꼬집어 말해야 할 특별한 잘못 없어도 아무 이유도 없이 그들을 아직 잊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해주고 나서야 그들은 안심한 듯 잘 지내고 살라고 알 수 없는 희미한 백지 같은 웃음을 거두고 사라져가야 불편한 마음도 지울 수 있다.
-계간 『미네르바』 2023년 겨울호 발표
최동호 시인 / 그림자
그대는 떠나가고 강가에
쪽배만 남아
봄바람 불 때마다 실버들 사이로
엷은 그림자 하늘거리네
최동호 시인 / 한산중학교 특강
전교생 열세 명, 햇살 반짝이는 유리창
코로나로 아홉 명 참석, 이순신
명량대첩 당시 쪽배 같은 수의 얼굴들
어깨 너머 푸른 바다가 출렁였다
최동호 시인 / 가랑잎 속달
여치 울음소리가 잦아들자
문득, 가을바람 나
입추 서고 여름날 그의 등이 어른거리는
유리창엔 가랑잎 속달
최동호 시인 / 가을 유리창
가벼이 단풍잎 바람에 날리고
맑은 햇살 황금빛 바람
쨩 쨩 쨩
유리창 부딪쳐 하늘이 우네
최동호 시인 / 생이 빛나는 오늘*
전생을 묻지 마라
금생이 전생이다
후생을 묻지 마라
금생이 후생이다
* 옛 불교 경전에서
최동호 시인 / 피어나라 풀꽃
작은 풀꽃에 떨어진
빗방울 하나도
우주에서 어둠 뚫고 날아 온
지구별 생명의 씨
최동호 시인 / 섬
고래가 물기둥 뿜어 하늘을 두드릴 때
파도 물결 타고
황금 나뭇잎에 실린
산 그림자 조용히 끌어 안아보는 섬
최동호 시인 / 해골바가지
꿈속의 피비린내까지
다 지우고 난
해골바가지 우물통 맑은 물
푸른 하늘 흰 구름
최동호 시인 / 빙하의 시
파지 쌓인 책상에 쏟아지는
정오의 폭포 같은 햇살,
빙하 만년 푸른빛 펼치는 눈부신
세상의 파도 물결
최동호 시인 / 불심의 젖가슴
어린 손자 지팡이 삼아 꼬부랑 길 언덕
법당을 찾아가던
까칠하게 말라붙은 할머니 젖가슴에
불심의 샘이 있다
최동호 시인 / 먹구름 기둥 어머니
먹구름 가족을 떠받치고 있던 어머니
나보다 큰 울음을 참고 하늘 기둥처럼 서 계셨던 것도 모르고 풍선 들고 울먹이던 어린 날
최동호 시인 / 자화상
거울 속에서 귀신 만나 분명
저 백발 귀신 어디서 봤더라,
머리통에 주먹 한 방 날리니 갑자기
해골 통 속 내가 튀어나온다
최동호 시인 / 진정한 가르침
스승의 가르침은 말씀이 아니라
침묵이다
후학이 진정 배워야 할 가르침
침묵의 전율
최동호 시인 / 원룸
열쇠 구멍에 키를 넣고
찰칵, 빛이 번쩍
깨어나라 봉인된 방이여
찰칵, 어지러운 이부자리
최동호 시인 / 비상하는 시의 눈동자
거센 겨울바람이여 투지 없이 등성이에 오를 수 없구나.
연약한 봄바람이여, 대지를 뚫고 솟아오를 힘이 있도다.
나는 태풍의 눈으로 들어가 먹구름 속에 잠든 용을 깨워
비바람 뚫고 하늘로 비상하는 시의 눈동자를 찾으리라.
-시집 『생이 빛나는 오늘』에서
최동호 시인 / 정희고모
경기도립병원 지나 수원 지원 옆길에서 정말 우연히 만났다. 고향 떠나 어디서 숨어 산다는 소문이 들리던 고모가 골목길 돌담에 핀 작은 꽃잎 같은 입술로 나를 불렀다. 고모부가 갑자기 임시서기로 취직이 되어 이리 와 살고 있다는 것이다.
외가 집에서 중학교에 다니던 나는 그 날 저녁 단간 셋방 고모 집에서 말없이 큰 눈만 껌벅거리던 고모부와 함께 푸짐한 저녁상을 받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는 고모와의 약속을 굳게 지켰다.
정희 고모는 어느 날 다시 홀연히 사라졌다. 어린 시절 가장 예쁘고 똑똑해 온 집안의 사랑을 독차지했다던 정희 고모가 잘 나가던 고모부와 왜 그렇게 숨어 살아야 했는지 그 이유 나는 알지 못했다.
가출소년처럼 나도 외가 집을 떠난 다음 오랜 후까지 그날 정희 고모가 나를 부르던 그 은밀한 목소리의 떨림이 전해 왔다. 고모부와 헤어져 혼자 산다는 이야기도 들려오고 또 다시 남자를 만났다는 이야기도 들려 왔지만 저녁상 부산하게 차려오며 부모 곁을 떠나 어린애가 얼마나 외롭겠느냐고 호들갑을 떨며 반가워하던 정희 고모의 그 들꽃 같은 눈빛을 나는 아직 잊을 수가 없다.
최동호 시인 / 아우구스티누스를 생각하며 시를 버리다
신에 대한 강한 회의로 경건한 말씀을 전하는 성서를 휴지보다 가치가 없다고 집어 던져 버렸다는 젊은 날 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을 떠올리며 나의 시를 돌이켜 생각해 본다.
나의 시는 그대 한 사람의 마음도 꿰뚫지 못하고 나의 시는 그대 한 사람의 사랑도 얻지 못하고 나의 시에 뒤늦게서야 절망에 빠진다. 나의 시는 종이 한 장 뚫지 못하고 나의 시는 볼펜에서 삐져나와 종이 위에 낙서를 그리고 어두운 수채 구덩이 속으로 사라진다.
나의 시는 누구에게도 위로가 되지 못하고 나의 시는 종이만 버리고 읽히지 않은 채 사라진다. 한때는 나도 커다란 꿈을 가지고 있었다. 나의 시는 절망에 빠진 젊은 시절 나를 구해 주었고 나의 시는 떠나가는 작별의 아픔을 치유해 주기도 했다.
그러나 이제 나의 시는 시든 낙엽과 같이 되었고 버려지는 휴지처럼 바닥에 뒹굴고 있다. 나의 시는 나의 마음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한다. 나의 시를 이렇게 탓하고 있던 어느 날 밤 나의 시는 나에게 이렇게 말을 던졌다. 그러면 되었지 더 이상으로 무엇을 바라느냐.
시가 없었더라면 그렇게라도 살지 못했을 주제에 시만 탓만 하고 제대로 시를 쓰지도 못하는 사람은 이제는 시인도 아니라고 했다. 평생을 바쳐 온 나의 시를 바라보며 뒤늦게 깨닫는다. 불쌍한 나의 시여 그대는 사람을 잘못 만났구나. 이제 미련 없이 자유를 찾아가라. 불평으로 평생을 사는 어리석은 자를 떨쳐 버리고 자유를 찾아 멀리 떠나가라.
끝내 그대에게 버림받고 시로부터도 버림받은 나도 이제 시가 없는 세상을 찾아가서 아우구스티누스처럼 회개하고 마지막 남은 생을 신에게 의지하여 경건하게 기도하며 살아가려 한다.
-『계간파란』 2024-여름(33)호
최동호 시인 / 팔달산 아이들
"아버지는 타지의 직장으로 멀리 전근 가시고
어머니도 없는 빈 집에 늙은 박쥐 날아드는 소리 천장에서 들리는 밤
옛 이야기 팔달산 영 넘어 가면 졸음에 사원 눈꺼풀 할머니 속적삼에 풀려
전설이 굽이도는 외진 산모롱이 옷고름 길에 풀잎처럼 잠드는 아이들"
최동호 시인 / 불꽃 비단벌레
부싯돌에 잠들어 있던 내 사랑아! 푸른 사랑의 섬광 가슴에 지피고 불 속으로 날아가는 무정한 사랑아!
소용돌이 치는 어둠 속에서 탄생한 유성이 지구 저편 하늘을 후려쳐 다른 세상을 열어도 태초의 땅에 뿌리 박혀 침묵하는
서글픈 불의 사랑아!
유성이 유성의 꼬리를 잘라 번갯불 밝히는 밤 은하 반년을 날아서라도 나는 네 얼굴을 보고 싶다 영롱한 빛 불꽃가슴을 점화시켜다오 말안장에 새겨진 비단벌레 날개빛 * 내 사랑아!
*비단벌레 날개빛 : 경주 황남패총에서 1970년대초 출토된 5세기 신라 시대 유물. 말 안장 뒷가리게에는 비단벌레 날개가 장식으로 사용되었는 데, 그 빛이 아름답기 그지없어 세계적으로 주목받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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