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광규 시인 / 별 닦는 나무 외 6편
공광규 시인 / 별 닦는 나무
은행나무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부르면 안되나 비와 바람과 햇빛을 쥐고 열심히 별을 닦는 나무
가을이 되면 별가루가 묻어 순금빛 나무
나도 별 닦는 나무가 되고 싶은데 당신이라는 별을 열심히 닦다가 당신에게 순금 물이 들어 아름답게 지고 싶은데
이런 나를 별 닦는 나무라고 불러주면 안되나 당신이라는 별에 아름답게 지고 싶은 나를
공광규 시인 / 흰 눈
겨울에 다 내리지 못한 눈은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남은 눈은 벚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또 다 못 앉으면 조팝나무 가지에 않고 그래도 남은 눈은 이팝나무 가지에 앉는다 거기에 또 다 못 앉으면 쥐똥나무 울타리나 산딸나무 가지에 앉고 거기에 다 못 앉으면 아까시나무 가지에 앉다가 그래도 남은 눈은 찔레나무 가지에 앉는다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는 눈은 할머니가 꽃나무 가지인 줄만 알고 성긴 머리 위에 가만 가만 앉는다
공광규 시인 / 손 안에 돌
잔디꽃 화창한 영주사 법당 앞 돌 계단 세 살배기 딸 문주가
양손에 자갈 한 웅큼 쥔 채 오르려다가 번번이 넘어지며 운다
손을 비우면 쉽게 기어오를 텐데
버려라 버려라 하는 내 말 알아듣지 못해 번번이 나둥그라져 운다
저런! 빈손이면 쉬울 텐데
<열가지 맛의 시> 等等詩社 詩選集 4, 인북스, 2023
공광규 시인 / 외금강을 나오며
계곡 상류에서 내려오면서 박달나무 군락에서 상수리나무 군락으로 이어진다
그 아래 음지에서 잘 자라는 서어나무가 골짜기를 가려 하늘이 보이지 않는다
계곡에는 연분홍 옆구리 띠와 타원형 반점이 선명한 산천어 버드나무잎을 닮은 버들치가 있고
산송어와 알록고기 물이 고인 담소에는 옆구리에 주황색 세로띠를 두른 금강모치가 있다
장수하늘소 유충이 산다는 서어나무 줄기와 성충에게 줄기 즙을 젖으로 먹이는 신갈나무
큰흰줄나비와 네발나비 부전나비가 앉아있는 산기슭
금강산 대장봉 바위틈에서 발견됐다는 무메기름나물과 금강봄맞이꽃 금강초롱꽃과 도라지모싯대가 보인다
공광규 시인 / 카페 리스보아에서
고된 운명과 슬픔의 노래가 애절한 내가 한때 울면서 사랑한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노래 파두가 옛날 거리 골목골목에서 울려퍼진다는 리스보아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로 열다섯 시간 가는 것 말고 부산국제역에서 열차를 타고 서울과 평양과 청진을 거쳐 두만강 건너 블라디보스토크로 거기서 시베리아 횡단열차를 타고 모스크바까지 거기서 베를린과 파리까지 거기서 리스보아역에 도착하면 대서양을 향해 흘러가는 타구스강변
태평양변 부산에서 싣고 간 물별과 구름과 노을을 대서양변에 부려놓고 거기 물별과 구름과 노을이 보이는 카페에서 며칠을 울다오고 싶다
거기 옛 시가지를 걸어가서 만난 옛 서점에서 이름을 모르는 포르투갈어 시집 한 가방 사서 비행기 말고 열차로 며칠을 돌아오고 싶다
네가 없는 내 운명과 슬픔을 고된 삶을 노래하는 아말리아 로드리게스 노래를 들으며 물면서 돌아오고 싶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7월호 발표
공광규 시인 / 순두부찌개
순두부는 부드럽고 연하고 순해서 조금만 건드려도 부서지고 뭉개지기 쉬운 뇌 같은 것 마음 같은 것 연인의 입술이나 덜 익은 사랑 같은 것 그래서 처음에는 약한 불로 요리를 시작해야 하지
사랑의 처음처럼 약한 불에 참기름과 고추를 볶아 고추기름을 만들고 다음엔 좀 진전된 사랑처럼 센 불에 돼지고기를 돼지고기가 없으면 쇠고기를 볶아 입맛을 두텁게 하지 거기에 물을 붓고 마음처럼 잘 끓으면 양념으로 파와 바지락을 넣고 순두부를 넣으면 되지 계란은 넣어도 되고 안 넣어도 되고 요리사 맘대로
소시지를 넣으면 부대 순두부찌개 김치를 넣으면 김치 순두부찌개 만두를 넣으면 만두 순두부찌개 버섯을 넣으면 버섯 순두부찌개 들깨를 넣으면 들깨 순두부찌개 굴이나 새우나 주꾸미를 넣으면 해물 순두부찌개
사랑에 무르익은 애인처럼 부드럽고 연하고 순하여 다른 것과도 잘 어울리는 순두부는 입술의 맛 그러나 급하게 먹으면 입에 화상을 입을 수 있지 급한 사랑처럼 그래서 후후 불면서 먹어야 해 살갗에 불어오는 봄바람 흉내를 내며
공광규 시인 / 엉엉 울며 동네 한바퀴
평생 할 줄 아는 것이 뱀 구멍과 마누라 거시기 파는 것이었다는 뱀통 메고 산기슭 떠돌다가 벼락 맞아 죽은 땅꾼의 버려진 산소에도 잡목이 정수리까지 박혀 쓸쓸하다. 친구도 친구 자식도 다시는 돌아올 일이 없을 것 같아 울먹해지는 이민 간 친구 빈집 마루에 가득한 흙먼지 병을 얻은 친구의 홀아버지는 읍내 큰아들 집에 구들을 지고 누워 있단다. 어머니가 걸어서 시집왔다는 고개는 파헤쳐지고 개울 건너 경순네 빨간 함석지붕은 헐려 보이지 않는다. 지초실 종기네 민구네 옛집도 눈이 흐려 분간할 수가 없다. 교회당 사모는 도시로 떠나고 싶다는 소문이 돌고 젊은 여자의 팔 할이 다방아가씨란다. 겉늙은 내 시골 동창과 살던 다방아가씨는 도망쳤고 방앗간집 며느리 셋도 다방아가씨였는데 농자금을 털어 모두 집을 나갔다고 한다. 소고개 넘어 잘생긴 스님 하나에 보살이 셋이나 되는 된장 고추장을 많이 담아 장독이 많은 새 절 법당에는 벌써 죽은 시골 동창 사진이 빙그레 웃고 있다. 꿀벌이 분주한 재당숙네 마당을 지나 오십 중반에 폐가 무너진 아버지가 마루 끝에 쪼그려 앉아 퉤퉤 가래침을 뱉으면 뒤꼍에 있던 닭들이 겅중겅중 달려와 가래침을 맛있게 주워 먹던 옛집. 마당에 파도처럼 쓰러진 망초꽃대를 마구 밟아보다가 무너진 측간 똥독을 들여다보다가 쥐똥과 새똥이 범벅된 썩은 마루에 앉아 옛날을 생각한다. 나도 돈돌배기에 누운 아버지 나이가 되려면 십 년도 남지 않았다는 생각을 하다가 무능하고 어린 처자식들을 생각하다가 이내 마음이 서러워져 억새 엉엉 우는 산소에 넙죽 절을 한다.
-시집 『말똥 한 덩이』 실천문학사 2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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