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의섭 시인 / 거울 속의 불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6. 25. 19:15

윤의섭 시인 / 거울 속의 불

 

코가 막혀서 숲 냄새를 맡을 수가 없었다

보이지 않는 벽이 가로막고 있는 느낌

내가 갇힌 걸까 숲이 갇힌 걸까

어느 미술관 화랑 천장에선

십자가 모양의 틈으로 햇빛이 새어들고 있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사등분이 되어 흩어지고

끝내 귀환하지 못한 심장의 시간이 있다

멈춰버린 박동

멀어져 간 것들에는 생기가 없는 것이다

거울 속에서 타오르는 불에 온기가 없는 것처럼

저 너머에서 사후를 살고 있는 박제의 기억들

내가 모든 바람을 그대로 통과시키는 헐벗은 겨울나무가 무서워 보인다고 말하면

나를 외면해야 해

내게서도 생기가 사라지고 있거든

나는 피폐해질 준비 되어 있어 이건 목숨을 건 일

내게서 떨어져 있어야 해 거리감을 가져봐

혼자 갇히는 것으로도 충분하니까

어느 밤 골목을 걸으면서 나는 산 사람의 걸음걸이를 잊은 것만 같았다

​​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윤의섭 시인 / 채석강의 시간

 

 우리는 변산해수욕장에서 채석강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한여름에 쉬지 않고 두 시간 거리

 객기도 봐가며 부려야 하는데

 변산반도는 무심한 척 우리를 풍경으로 홀리는 중이었고

 우리는 쓰러질 지경에 이르렀다는 것을 쓰러지고서야 알았다

 택시를 타고 가서 채석강에 섰다

 퇴적암 나이 7천만 년 앞에서 우리가 걸었던 시간은 너무 짧았다고

 백악기 공룡처럼 어슬렁거리다 곧 멸종해도 이상하지 않을 거라며 실없이 웃어보고

 무모하지 않았던 날은 없었다

 밀물 때를 무시하고 버티다 간신히 살았다는 무용담을 내게 겹쳐본다

 지금도 나는 조난자다

 침몰하는 나를 바라보면서도 나는 나의 손을 잡아주지 않았다

 무모의 퇴적층에 발을 딛고 숨 쉴 수 있을 때까지

 계속 무모해야 했다

 인간의 시간을 끝내지 않으려면 인간임을 멈추지 말아야 해서

-계간 『시의 시간들』 2024년 가을호 (창간호) 발표

 


 

 

윤의섭 시인 / 성장

 

 

놀이터에서

유치원 아이들이 미끄럼틀을 타며 논다

줄을 서야 기회가 빨리 온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네 잎 클로버를 찾다 포기한다

네 잎 클로버가 행운인지 찾아내는 게 행운인지 모르겠다

 

아파트 벽에는 밑동에서부터 금이 가지를 뻗으며 자라났다

어렸을 때 아버지는

앞마당의 덩치 커진 은행나무 뿌리가 집을 무너뜨릴 거라며 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날 나는 가슴 어딘가가 알 수 없이 아렸다

 

찾았다

옆에서 누가 네 잎 클로버 줄기를 끊어내며 소리 낸다

저렇게 꽃도 못 피우고 죽은 풀잎

 

선생님이 나타나자

유치원 아이들은 풀잎 같은 얼굴을 들고 모여든다

얘들아 줄 서야지

갑자기 가슴이 아려왔다

 

 


 

 

윤의섭 시인 / 부러짐에 대하여

 

 

죽은 나무는 저항 없이 부러진다

물기가 사라질수록 견고해지고 가벼워지고

아마 죽음이란 초경량을 향한 꼿꼿한 질주일 것이다

무생물의 절단 이후는 대개 극단적이다

잘려나간 컵 손잡이는 웬만하면 혼자 버려지지 않는다

강철보다 무른 쇠가 오래 버티었다면 순전히 운 때문이며

용접 그 최후의 방편은 가장 강제적인 재생 쉽게 주어지지 않는 안락사

수평선 너머 부러진 바다와 구름 사이 조각난 낮달

나는 네게서 얼마나 멀리 부러져 나온 기억일까

갈대는 부러지지 않는다지만 대신 바람이 갈라지고 마는 걸

편린의 날들은 사막으로 치닫는 중이다

이쯤 되면 버려졌다거나 불구가 되었다고 말하지 말아야 한다

언젠가는 스스로 부러질 때가 있었던 것이고

서로의 단면은 상처이기 전에 폐쇄된 통로일 뿐이라고

둘로 나뉘었으므로 생과 사의 길을 각자 나누어 가졌다고

조금 더 고독해지고 조금 더 지독해진 거라고

부러지고 부러져

더는 부러질 일 없을 때까지 부러

진 거라고

 

 


 

 

윤의섭 시인 / 누설

고백건대 나는 지독한 공상가지만

공상을 증명할 수 없듯 내가 공상가라는 사실을 증명할 수는 없다

 

겨울나무에 붙어 있던 나뭇잎 두 장이

봄날 나비의 날개 한 쌍이 될 거라는 생각

몇 년 전 태양계를 다녀간 오무아무아는 외계우주선이고

마야의 달력에는 종말의 날이 기록되어 있다고

인간의 시대 이전에 인간의 시대가 있었고

 

빛의 속도로 당신을 따라갑니다

따라잡을 수가 없습니다

서로의 시간이 반대 방향으로 흐르기 때문입니다

당신은 떠오른 적 없는 달이라고 은유해 봅니다

심장을 뛰게 할 만큼의 중력만 느껴져서입니다

산책길에 마주치면 못 알아볼 겁니다

우리가 아직 알지 못했던 때로 돌아간 거니까

 

공상할수록 나는 지워진다

공상은 근본적으로 슬퍼서

나는 기원 없이 지워진다

그러므로 나는 일생을 바쳐 공상하는 중이다

 

내겐 보름 정도 나타났다 사라지는 계절이 있어

가을에서 가을 사이

바람의 문을 통과하면 거닐게 되는 느린 시계의 화원을

잠시 냄새 맡다 둘러보면 어느덧 지나가 버린 계절

당신이 살고 있는 화원을 당신은 꽃이 없는 화원으로 가꾸어 놓았다

 

괜찮아요 이제 겨울이에요

 

잎새를 다 떨어뜨린 가로수가 바코드처럼 서있다

이 거리의 풍경을 암호화 해놓고 긴 잠에 들었다

텅 빈 거리

나무를 읽을 사람이 없는 거리

 

당신의 화원을 닮았습니다

다행입니다

-계간 『시산맥』 2023년 겨울호 발표

 

 


 

 

윤의섭 시인 / 암막

 

 

네 어둠을 지켜줄게

이런 마음은 눈 내리는 장면을 닮은 것이다

나는 바닥까지 드리운 결심을 걷어내지 않는다

몇 년을 자다 깬 듯한 아침

이사 온 지 한참 됐어도 낯선 거리

버스기사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식당 주인과 얘기를 나누면서도

나는 나로부터 동떨어져 있다​

눈은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고

창가에 앉은 나는 거대한 눈물이었다

네 어둠은 새어나가지 못할 것이다

이런 저주를 나는 거둬들일 생각이 없다

내가 막고 있는 건 햇빛 별빛 가로등 빛 무수한 종류의 빛 반대편으로 내몰린

모든 곳으로부터의 끝에 사는 생물

나는 풀려날 때를 기억하고 싶지 않다

두려운 것일까

눈처럼 마침내 사라져 버리는 일은

 

-계간 『詩로여는세상』 2024년 봄호 발표

 

 


 

윤의섭 시인

1968년 경기도 시흥 출생. 아주대 국어국문학과를 졸업. 同 대학원에서 박사학위 취득. 1992년 《경인일보》 신춘문예와 1994년 《문학과 사회》를 통해 등단. 시집 『말괄량이 삐삐의 죽음』 『묵시록』 『천국의 난민』 『붉은 달은 미친 듯이 궤도를 돈다』 『마계』 『어디서부터 오는 비인가요』등.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 현재 〈21세기 전망〉 동인으로 활동 中. 대전대 문예창작창작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