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서화 시인 / 조율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6. 25. 19:57
이서화 시인 / 조율

이서화 시인 / 조율

 

 

놀이터에서 아이가 넘어지자

울음이 몸 밖으로 확 쏟아져 나온다

엄마의 품에 안긴 아이,

아코디언 같다

 

오래전 불안의 연주에 울어 본 기억이 있다

집을 묻고 엄마를 묻고 이름을 묻던 불안의 한때를 기억한다

 

그 후 미아迷兒가 되고 싶기도 했으나

많던 불안들은 다 어딘가로 사라지고 없다

온몸을 맡기고 싶은 울음이 없었다

 

아이의 몸 안으로 울음을 넣어주는 엄마

얼룩으로 번진 울음과 흐느낌을 토닥거려

몸으로 다시 들여보내는 저 조율의 한때

불안한 음이 가득 들어 있는,

유년의 중심은 발이 너무 가볍다

 

비스듬히 기울어있는 나무들에서 바람이 쏟아진 후

다시 잠잠해진 가지들

지상의 사물들도 모두 조율의 시간을 가진다

공중으로 퍼지는 물줄기와 온갖 소음들이

오후의 놀이터를 조율하듯

어둑한 한기가 몸에 시절을 묻고 있다

 

 


 

 

이서화 시인 / 날씨 수리공

 

 

 부러진 빗줄기가 흩어진 눈송이를 본 적 없지만, 날씨를 수리하는 수리공을 본 적은 있다 양동이에 빗물을 받거나 지붕에 쌓인 눈 더미를 치우는 수리법이 아니라 날씨들의 뒤끝, 우산이라든가 눈이 녹지 않은 오르막에 모래를 뿌리는 일을 하는 수리공을 많이 봤다

 

 서둘러 장독 뚜껑을 덮거나 빨래를 걷는 일도 알고 보면 날씨를 수리하는 일이다

 

 앞서가는 절기들에 도착하는 계절 모두 수리하고 손을 봐야지만 싹이 트고 까끄라기가 생기고 보리숭어들이 연안을 지나간다 고인 물의 물꼬를 트는 일, 새가 둥지를 떠나는 일도 모두 관련이 있는 것 날씨 수리는 끝이 없고 계속된다

 

 무엇보다도 절그럭거리는 빗줄기를 허리며 어깨에 넣고 있다가 비가 그치고 개이면 씻은 듯이 낫던 그런 수리공이 그중 제일이었다

 

-『경향신문/詩想과 세상』 2022.08.22.

 

 


 

 

이서화 시인 / 석이버섯

 

 

고지대에서 따온 버섯에서

서걱거리는 바람 소리 들린다

몸에 붙은 바람을 털어내다 말고

가만히 들여다보니 바위의 각질같다

아니, 오래 묵은 암벽의 누추한 옷가지같다

 

고요한 숲속의 나무는

각질을 밀어내며 자라고

바위는 앏은 각질을 밀어내며 조금씩

그 부피가 줄어드는 것이다

 

비가 오면 바위에 먼지가 돋는다

그것은 매번 구름을 불려 벗기는 하늘에게서 배운 일

바위의 미세한 포자는 바람에 날리고

절벽과 허공 사이로

빗방울이 또르르 말린다

 

세상에 어떤 바위든

자의적으로 자리 잡은 것은 없다

한 번쯤 다 굴러본 경험으로

기암이다

 

석이버섯을 물에 불리면

어느새 바위도 이렇게 부드럽게 물러진다

말대로라면 산 아랫마을 사람들은 모두

저 큰 바위를 조금씩 먹었다

 

바위도 이렇게 사라진다고 말해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서화 시인 / 흔들리는 균형

 

 

물지게를 기억하시는지

아무리 가득 담아도 출렁출렁 흘리던 걸음

균형 하나가 제대로 잡히기까지

온전한 물통 속의 물은 손실이 크다

그래서 더욱 가득 담아졌던 물

미리 흘릴 균형까지 고려하고 담았었다

담긴 양이 제각각 달라도

물통에 남아 있던 물은 늘 같은 양이었던가

균형은 어깨와 발걸음의

출렁거림이 아니라

물통의 그 수위에 있었다는 것

 

그러니까, 그때

나의 균형은 다 흘러넘쳤다

빈 것들의 속내일수록 휘청거리기 쉽다

더 이상 흘려버릴 균형추가 없는

나이가 될수록 균형을 지키는 것이 어렵다

가령, 팔이 자꾸 안으로 굽는 일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다툼 사이에서

균형은 또 그때처럼 흘러넘친다

 

봄, 바람이 출렁거리며 넘친 벚나무는 이미 바닥이 났고

평행을 유지하던 몸,

출렁거리던 옛 기억들도 감흥이 없다

그때, 오래도록 물이 다 새어나간

어깨가 살처럼 아프다

 

 


 

이서화 시인 / 국숫집

 

 

 들판을 지나는 길가에 널어놓은 국수를 바람이 끓이고 있다

 

 가지런하고 빳빳하게 굳은 국수 저곳에서는 바람도 햇살도 모두 굳어버린다 한 묶음 햇살 줄기도 가지런하고 더없이 연약한 국숫발 사이로 바람이 지나간다

 

 곰표 밀가루가 쌓여 있는 가내 국수 공장 그 사이를 말없이 뻣뻣하게 움직이는 두 남자 뚝뚝 마른국수를 분지르는 손길이 분주할 때마다 국수 묶음이 쌓여 가고 가끔 새참 같은 눈빛들 마주친다 어둑한 저녁 무렵 국수심부름 다녀올 때면 온몸에 힘이 들어간 채 국수 한 가닥씩을 까만 눈동자처럼 뽑아 먹었다 단단했던 묶음이 조금 헐렁해질 즈음 집엔 물이 팔팔 끓고 있었던가 삶으면 서로 엉키는 국수는 든든한 식구가 되었다

 

 저 연약한 줄기가 배 속에 들어가면 한 끼가 되고 허기진 몸을 굳건하게 일으켜 세우던, 무엇이든 불어 터지는 힘으로 늘 비탈밭을 닫고 나오던 또 아버지

 

 


 

 

이서화 시인 / 굴절을 읽다

 

 

베란다 유리창에 어둠이 내리면

거기, 유리의 거실에

말 없는 가족이 평면으로 다정해 보인다

어쩌다 눈 마주친 여자가 나를 본다

어둑해지면 나타나서

공중의 평수에 살다 가는 굴절의 가족이 있다

어쩌면 그들은 기슭의 부족이 아닐까

문을 열면 캄캄한 공중으로 흩어지는 불안한 세상의

불안한 후예들은 아닐지

 

어쩌다 저들은 얇은 강화유리에 세 들어 살고 있을까

창문 밖에서만 웃고 떠들고 있는

닫혀 있는 가족

 

화분들이 자라고 드라마가 방영되고 쾅하고 문이 닫히고 커튼 뒤에 숨어서

미닫이문을 열면,

한 쪽의 문으로 옮겨가는 굴절의 저녁

너무도 익숙한 풍경들이

몇 평 창문의 불빛에 매달려 산다

 

강화 유리 두 장 너머

불안한 사람들은 여전히 불안하다

모든 공중엔 흔들리는 겹겹이 있고 모든 불빛엔

꺼지고야 마는 밝기가 있다

밝은 시간엔 사라졌다 어둑한 저녁에 둘러앉는

딸깍, 꺼지는 가족들

 

 


 

이서화 시인

1960년 강원도 영월 출생. 상지영서대학 문예창작과 졸업. 2008년 《詩로 여는 세상》을 통해 등단. 시집 『굴절을 읽다』 「낮달이 허락도 없이」 『날씨 하나를 샀다』. 2019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창작기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