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봄 시인 / 비밀 외 5편
임봄 시인 / 비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을 말해 볼까요
이른 저녁 송도해수욕장에서 난생처음 먹어 보던 파도 거품 같은 투게더 아이스크림
십 년 만에 집에 온 아버지가 손에 들고 환하게 웃던 처음 보는 파인애플과 노란 바나나
친구네 집 넓은 거실 먼지 앉은 까만 피아노와 커다란 갈색 곰 인형
크리스마스이브 새벽 머리맡 찌든 플라스틱 선물 바구니에서 시들어 가던 시고 달달한 귤 다섯 개
뙤약볕에서 장사를 끝낸 엄마의 돈주머니에서 모습을 드러내던 축축하고 황홀한 지폐 냄새
아버지가 다녀간 밤이면 새벽 기도하듯 이불 속에서 흐느끼던 무덤 같은 둥근 등
문신처럼 새겨지는 푸른 멍을 피해 맨발로 담장 아래서 함께 듣던 새벽 세 시의 빗방울 소리
치욕을 잊게 하는 허기와 저녁이면 몰려오는 깊은 잠
그리고 잠들수록 아름다워지는 어제,
임봄 시인 / 가장 멀리서 오는 지금
반듯한 네모가 좋아 반듯한 세모나 반듯한 원이랄지 이를테면 누가 쿡 찌르거나 슬쩍 잡아당겨도 탄력 있게 되돌아가 감쪽같이 처음의 모양을 만들 수 있는 것들
모양을 바꾸며 다가오는 친절한 웃음들 내 입술은 덩달아 비틀어지는데 꽉 다문 이빨은 아무리해도 틀어지지 않으니 식사를 끝낸 짐승처럼 순하게 양발을 모으고 나보다 오래 살아남을 머리카락은 길게 늘어뜨리고 두 손은 가지런히 가슴에 얹고 원형으로 돌아가 순진하게 웃어줄까
태초의 나와 만나기 위해 손가락을 넣어 뼛속까지 구토를 하는 저녁 화석이 되어본 적 없는 흑백의 앨범과 오늘은 기어이 아메바처럼 몸을 섞을 테다 모양도 이름도 없이 치러야할 지독한 형벌에 대해서는 극한의 허기진 뇌로 맞이할 테다
수학을 모르는 숫자가 좋아 모든 숫자들을 한꺼번에 사라지게 만드는 숫자 ‘영’이 좋아 말캉거리는 비밀의 문에서 방황하다가도 휘청대는 지금을 당당하게 딛고 일어서는 둥근 무릎 뼈가 좋아 -계간『시와 미학』 2015년 가을호 발표
임봄 시인 / 백색의 이면
길들여지기를 거부한 늑대, 너는 몽골에 두고 온 바람천막이다 야생의 독을 감추고 굶어 죽은 전갈의 전생이다
먼 곳의 말발굽 소리를 기억하는 등불 새로 걸어둔 밧줄은 하루의 길이만큼 닳았다 훈장으로 새겨진 상처를 헤집고 전사들이 은빛 달 비린내를 몰고 온다
소금호수에서 걸어오는 낙타 속눈썹이 열리고 닫히는 사이에 자라던 무중력의 시간들 등 뒤를 따라오던 공백들은 한 번도 온순하게 불을 피운 적이 없다
나는 정작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박하냄새 나는 눈길을 맨발로 걷는다 길게 자란 송곳니가 덥석 목덜미를 물자 숲이 점점 멀어지고 있다
-시집, <백색어사전>, 장롱
임봄 시인 / 黑-7
한때 살아 숨 쉬던 것들의 장례식이 날마다 다른 방식으로 치러진다 음식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냉장 혹은 냉동되었던 식탁 위의 생들,
죽음이 또 다른 삶을 연명하듯 어제의 허기들을 기억한다 함께였던 어제와 혼자 살아남는 오늘 아직 늑골 한 구석에 숨어 눈을 번득이는 탐욕스런 또 다른 허기들에 대하여
나는 과거를 살고 싶지 않아 갓 태어난 신선한 상추의 죽음을 음미하고 새로 만든 무덤에 핀 흰 도라지꽃을 식탁 위에 꽂아놓고 싶을 뿐이야
살아남는다는 것은 미처 채우지 못한 산 자의 허기를 위해 또 다른 살인을 모색하는 일
몇 장의 돈과 바꾸어온 죽음을 밥 먹듯 하는 오늘은 또 얼마나 많은 죽음과 타협하여야 하나 맷돌 같은 어금니로 죽음을 씹으면서 이 식탁에서 저 식탁으로 나아가고 있는 우리는,
임봄 시인 / 백색-고양이
나는 고양이, 담쟁이 넝쿨 수북한 담장 위에서 휘휘 휘파람을 불어요. 세상은 정지되고 나는 로프 없이 번지점프를 해요. 말귀를 못 알아듣는 개미들이 서로 꽁무니를 물어뜯고 일렬로 늘어선 슬픔이 느리게 행진할 때도 당신의 구두는 명랑한 스타카토로 달리는군요. 별들은 탄력 있게 울고 망고쥬스에서는 바다냄새가 나요. 나는 식탁 밑으로 숨고 숫자 속으로 가라앉고 당신의 편두통 안으로 기어들어요, 감쪽같이, 수학 공식이 깃든 풍경 속에서도 배꼽이 단단해지는 비밀을 알면서 다시는 고향에 갈 수 없었지요. 고독을 들키려고 내장을 다 드러낼 필요는 없어요. 나는 길게 히히 웃고 야옹 하고 짧게 울었지요. 태양의 흑점에서 날개를 접은 나비가 다시 날지 못한다 해도 그건 당신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요, 말아 올린 꼬리에서 뿌리가 내려 넝쿨로 스미고, 스미고, 스며요, 점점 빠르게. 어쩌면 날개가 돋을지도 모르지요. 아, 전에 이미 말했던가요
임봄 시인 / 백색의 기원 ㅡ 레퀴엠 (칸타빌레-노래하듯이) 투명한 유리에 새겨진 음화(陰畵), 검은 동공으로는 만질 수 없어요 빨강인지 파랑인지 하양인지 까망인지 사막에 살던 분홍 물고긴지 북극에 살던 노랑 코끼린지 (세뇨) (두르체멘테-달콤하고 황홀하게) 엄마! 내가 사람을 죽였어요* (알레그로 논 트로포-빠르게, 그러나 너무 지나치지 않게) 아궁이에서 갓 꺼낸수수깡으로 무채색 그림을 그린 적이 있나요 촛농으로 만든 식탁에 앉아 트라이앵글 협주를 들은 적이 있나요 뜨거운 눈을머리에이고 달려오는 뿔 달린구름을 본적이 있나요 (피아니시모-매우 여리게) 그땐 한번도 모자를 벗지 않던 노인이 모자를 벗을 거예요(피네-끝) (포코 아 포코 아다지오-조금씩 침착하고 느리게) 아주 오래된 전설 속의 파랑이예요 파랑이라 생각하는분홍이예요 분홍이라 생각하는 까망이예요 한 번도 까망인 적 없는 비밀스런 하양이예요(달세뇨-세뇨로 돌아가서) (카텐짜-자유로운 무반주) (스모르짠도-서서히 음을 여리게) 밤새 검은 묘지를 떠돌아다니는 빨강 도깨비 불,(페르마타-음을 최대한 늘여서) 프랙탈로 빚은 빛의 음화(陰花)예요 -시집 『백색어사전』(22세기 시인선, 2015)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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