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함태숙 시인 / 포레스트 외 4편

파스칼바이런 2025. 6. 27. 15:04

함태숙 시인 / 포레스트

 

 

하늘에도 빙벽이 있어 뚝! 떨어져 나가고

흰 기러기 74마리 알 216개 검은 시로미 열매 300만 개를 먹어야 한답니다

잠시 허공을 가졌다 어떤 대륙은 정처 없이 쏟아지는 돌비가 돼요

등지고 시작하는 마음으로 두 눈의 둥근 우레 구멍

집들을 쌓아 올린 패총 같은 기억들을 내려다보며

 

저렇게 살고 싶었던가 창 안에 눅눅한 빨래가 주인을 기다리는

여러 몸의 한 가지 마음으로

 

손톱만한 틈이 있다면 자생하고 싶었는데

물에는 뿌리가 없다네요 근원을 닫고 지나가는 연인이여

사랑이란 구조를 버리니 모든 길이 모든 길이 온 곳으로 돌아가는 길뿐이군요

지구를 뒤집어보면 무른 태양을 볼 수 있을까

비에 곯은 알을 가리는 날개의 신정으로 흰 기러기 74마리 흰 기러기 알 216개 검은 시로미 숲 300만 헥타르

 

돌아보면 돌이 되어라 우리는 부리를 깎고

보고자 하는 곳으로만 간다면 길게 흙을 묻힌 것은 어쩌면 두 날개

 

먼 기억의 밤들은 살금살금 내려오네 죽음은

신의 안와 뼈에 담겼네

 

악행이여 노래가 되어라 후렴을 풀어도 10행을 넘기진 않는

너의 흉몽을 다스리는 빙글빙글― 금빛 아카식

 

눈 없는 여자가 안구를 들고 있다

한 사람의 몸 안에서 길게 흘러나온 내장 같은 골목 끝에서

 

 


 

 

함태숙 시인 / 토성에서 생각하기

어디서 이 간극은 발견된 것일까

생이 여러 번이었다면 가장 단순한 곡선이 되었을 거다

부피를 삭제한 바다처럼

깊이란 건 수평의 개념이 되는 거지

끝없이 길어지는 양팔을 봐

무릎을 가슴에 싸안듯이

우리는, 우리의 바깥으로 튕겨져 나가지 않게

우리의 감옥을 자처하며

하나의 둥근 질량을 얼음과 먼지의 고리로 에워싼

당혹스러운 아름다움을

노이로제에 걸린 연인의 눈 속에서 번쩍! 이는 섬광을

떨어진 부싯돌을 주워 들듯이 이게 맞나? 망설이며 모든

생애의 허리를 굽히듯이

그때 다시 리셋 되는 시계처럼

혼자만의 유일한 설득으로 다시 나를 데려오는

너는, 다정한 나의 몰락

근접하면 타버리는 표면을 끝까지 다이빙하며

너는 영혼 속에 어떤 간극을 포함시켰다 네가 사라지며

재생되는

사랑의 기술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생활 위로

폭우가 내린다 미친 듯이 소멸하는 피사체를 따라잡으며

끝없이 전송하는

전소하며 내려앉는 음악이 되어

 

 


 

 

함태숙 시인 / 앤데믹

 

 

 이인을 초과하면 불법이 되던 때가 있었지

 언어는 중의적이니까 근원지를 발생지로 해 보자 질병의 포털은

 초음파로만 감식되는 것 같아 검고 축축한 날개를 만들었지 불가능한 창공을 발밑에 파고

 영원은 얼마나 수축할 수 있을까

 곰팡이가 피고 지네가 슬듯이 공포가 몰고 온 미지를 확장하는 발 더듬으면 방이 되는 무해한 밤이 시작된다 주체로부터 자유로운 조사가 익일을 끌고 가는

 (너는 문상을 가고

문장은 유족처럼 흩어진다 이 배열에는 극도의 증오가 묻어있다)

 

 음소의 지분을 요구하는 무분별한

 소음들

 자기를 말소하기 위하여 긴 시를 쓰며 견뎠지

 

 얼굴을 폐문하는

 흰

 

 백지의 공포를

 양 귀에 걸치고 너는 판서를 거부하는 칠판처럼

 

 압도당한다

 몇 개의 미래를 파괴하고 돌아왔을까?

 

 회상하는 단어들 어떤 고백도 현재형일 수가 없잖아 3년 4개월이 증발했으니까 제도권 아래 분류되는 감정들 이인으로 구성된 치외법권

 우린 간신히 인간이라고 불릴만한 형체를 집어 들고 돌아왔지

 

 일회용 산적하는 폐기물들을

 피부의 신소재로 제안하고

 

 접촉이 질병이 되는 사랑을 배워왔다

 상상을 멈추면 사라지는 세계가 있었다

 

 흰 백묵처럼 뚝뚝 부러지는 이인들이

 

웹진 『시인광장』 2023년 8월호 발표

 

 


 

 

함태숙 시인 / 해밀턴 거리

 

 

 너는 단순하고 투명하고 머리도 없다 들키면 사라질까 봐 파묻은 날씨들 얼음알갱이처럼 구르는 돌들 빈 점막에 부딪치는 물결들 얌전히 기다리다 눈뜨지 못한 잠들이 눈꺼풀에 매달렸다 거꾸로 선다 전봇대처럼 띄엄띄엄 떨어지자 낮과 밤이 힘껏 껴안은 모습으로 이 거리는 평등하다

 

 훕! 훕! 훕! 잡아당겼다 뿌리치며 발명하는 날개들 유리로 만든 폐 안에 찰랑거리는 음성들 긴 목을 수그리며 얼마나 멀리까지 날아갈 수 있을까 저녁의 식탁으로부터 각기 다른 문수의 새들은

 

 159개의 마침표가 찍혀 있는 공중의 페이지를 열고 작고 협소한 얼굴로 기다린다 가장 짧은 문장들로 거리들 눕힌다 접혔다 펴지는 손금처럼 흙에 섞이며 뿌리도 없이 아아악! 터지는 꽃처럼 빛 속에 파놓은 터널 처럼

 

 지구를 다른 관점으로 감싸 안기 위해 시시때때로 화산이 폭발하고 흰 재가 쌓이고 핏기 없는 팔뚝이 빈 꽃을 들고 나오는 어떤 날 어떤 시간이 생겨난다 예고된 분홍 거짓말처럼 피아를 식별하지 못하여 아름다움에만 몰두하는 발굴하는 길어진 길들처럼 단순하고 투명하고 머리도 없다 이 골목은

 

 슬픔보다는 한 명의 고독한 행인처럼 자기를 지나는 중이다

 

 


 

 

함태숙 시인 / 세계는 신의 자작극일까

 

 

사건이 종료될 때까지

사건에 끝까지 칼을 대던 그 손의 주인을

부리는 큰 손을

 

보고 싶다

 

자가증식하는 손안의 뇌량을

과실로 따가는 신들의 과실을

 

양날 가위를 철컥거리며

 

죽음을 촉지하는 열 손가락 끝의

소용돌이와 폐색중의 활자를

 

석유 내를 풍기며 떠다니는 미래의 입술을

 

보고 싶다

 

첨탑 끝에 꽂힌 얼굴을

 

사지들 그물처럼 펴서

피 묻은 지느러미들 거둬가는

 

말할 수 없는 저녁을

 

사건을 기획하고

첫 번째 인과를 튕기며 내려오는

 

신성한 자작극의

그림자 극장에서

 

침울하게 톱밥처럼

그 자신을 썰고 있는 우주나무

 

자신의 실패가 부끄러워

빛은 기꺼이 후면에

 

소멸은 마침내 합의에 이르렀다

 

우리는 악수를 하며

피를 조금 흘려야 하는

악수를 남겼지 그러나

 

부디 미학적 절차에 입각하기를

 

계약을 파기한다는

계약서들

 

돌아서서 들여다보며 너는 사라진다

 

 


 

함태숙 시인

1969년 강원도 강릉 출생. 중앙대 심리학과, 同 대학원 임상심리학 전공. 2002년 《현대시》를 통해 등단. 시집 『새들은 창천에서 죽다』 『그대는 한 사람의 인류』. 2019년 서울시 문예진흥기금 수혜. 웹진 『시인광장』 편집위원 역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