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길옥 시인 / 배밀이 외 5편
이길옥 시인 / 배밀이
1. 노모의 억센 갈퀴손이 질퍽한 개펄을 더듬어 고막을 줍는다. 굽은 허리 땀 밴 치마끈으로 질끈 동여맨 뒤 왼발 뻘배에 꿇리고 오른발로 오리 발차기 하듯 팔십 평생을 밀어내며 뻘을 뒤져 고막을 찾고 있다.
2. 비 온 뒤 빗물 고인 재래시장 좁은 골목을 갯고랑이듯 배 한 척이 천천히 들어선다. 배에 실린 낡은 녹음기 입천장으로 벌써 고전이 된 유행가가 테이프에서 풀려나며 서럽게 서럽게 울다 목이 쉰다. 사공의 오체투지가 절단 난 무릎에 덧댄 타이어 밑에 깔리고 그 곁의 텅 빈 깡통에 빗물이 고여 있다.
3. 가뭄이 죽어 못사는 황톳길 푸석푸석한 먼지를 바람이 건들고 있다. 목마름으로 뒤척이는 갈증을 못 이긴 지렁이 한 마리 황톳길을 덮고 시시덕거리는 먼지에 온몸으로 고통을 일필휘지한다. 필생을 다 적지 못한 한을 S자로 비틀어 굽히면서 배밀이하고 있다.
이길옥 시인 / 얼마나 좋을까
아픔의 뿌리를 확 뽑아낼 수만 있다면 슬픔의 가지를 싹둑 잘라낼 수만 있다면 불행의 가지를 우지끈 꺾어낼 수만 있다면 가난의 울타리를 와장창 무너버릴 수만 있다면 그리고 아, 그리고 탐욕의 벽을 헐어 몰아내고 즐겁고 행복한 기쁘고 가슴 벅찬 나날이 넘친다면
시기와 질투로 곪은 생각 도려내고 남을 위해 내 몸 다 바칠 수만 있다면.
이길옥 시인 / 뒷방
뒤라는 말에는 떳떳하지 못한 묘한 감정이 똬리를 틀고 앉아 고개를 빳빳이 세우고 있다.
약간 음흉한 속셈이 비집고 들어와 음산한 그늘을 깔아놓은 침침한 방구석 퀴퀴한 곰팡냄새가 웅크리고 있다.
함부로 드나들어서는 안 되는 거부감 같은 것이 오싹한 한기로 도사려 앉은 곳
뒷방의 문을 열어본다.
지금까지 가슴에 묻어온 편견이 문지방을 넘은 햇볕에 증발되고 있다.
뒷방 혼자 가슴앓이해온 오해가 환하게 풀리고 있다.
뒷방이 따뜻한 온기로 맞아준다.
이길옥 시인 / 생선가게 시인 사장 어 여사
명문대학에서 짠물에 절여지면서 더욱 싱싱해진 덕으로 일찍 신춘문예 높고 좁은 문을 거뜬히 통과한 어 여사
몇백 대 일의 바늘귀를 뚫고 얻은 대기업의 유니폼을 벗어 던지고 어물전 귀퉁이에 자리하나 빌려 좌판을 깔던 날 쨍하고 뜬 햇살이 생선 비늘에서 미끄덩 넘어지고 있었지요.
내 인생 내 멋대로 사는 게 행복이라는 내가 하고 싶은 것에 간섭받지 않는 것이 기쁨이라는 어 여사
손에 비린내를 묻혀 좌판에 시를 쓰고 있네요.
갈치로 1연 3행 조기로 2연 4행 명태로 3연 5행 잡어로 4연을 마무리하고
독자를 불러들이는 어 여사
골골한 생선 냄새로 절여지며 유명세를 타네요. 명물로 떠오르네요.
이길옥 시인 / 디딤돌
노는 곳이 다르다.
물 가운데 터를 잡고 앉아 제 할 일을 다 한다.
평생을 물 앓는 소리에 묻혀 살면서 등을 내주는 재미에 푹 빠져 뼈마디가 무너지는 통증도 삭인다.
어쩌다 홍수를 만나는 날이면 숨 막히는 자맥질로 곤욕을 치르지만 그도 한때
여덟 살 개구쟁이 보폭으로 듬성듬성 물줄기의 허리에 뿌리내리고 길이 되어준다.
이길옥 시인 / 맨 날 허탕이다
노는 날이 내 앞에 버티고 서면 나는 조급증에 휘말려 들뜨고 만다. 우선 쉬는 날짜에 해야 할 일을 접목시키고 자투리를 찾아본다. 이를테면 노는 시간과 일할 시간을 맞대보는 거다. 그런데 언제나 한결같이 일할 시간의 키가 더 크다는 것에 짜증이 난다. 짧은 연휴라든가 긴 방학에도 늘 하고 싶은 일들이 줄줄이 고개를 들고 앞다투기에 열 오르다 보면 강단지던 마음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흔들리던 마음의 뿌리가 통째로 뽑혀 이것도 저것도 이룬 것 없이 시간만 거덜나고 그 자리에 허탈만 무성하게 자란다. 노는 날만 되면 친구 놈들 할 일 없이 빈둥대는데 나는 할 일에 깔려 캑캑대며 허덕이다가 결국 빈손 툴툴 털고 만다. 이룬 것 없는 빈 껍질만 뎅그렇게 남아 또 다른 노는 날에 기대를 걸어놓고 슬그머니 꽁무니 내리고 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