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효은 시인 / 단편영화-세탁 외 6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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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은 시인 / 단편영화- 세탁
그녀는 세탁기 안에서 발견되었다 이웃의 증언에 의하면 그녀는 이전에도 세탁기 안에 들어가 종종 오래 웅크렸다고 한다 세탁기 속에 태아처럼 허리를 말고 엄지 손가락을 빨았다고도 한다 전원을 눌러주세요 성령 충만한 양수를 채워주세요 그녀는 세탁기 문에 편지를 써 붙였다고도 한다 드럼 속에서 드림을 꿈꾸던 그녀는 무릎을 끌어안고 간절히 기도를 했다고 한다 그녀는 새 부대가 되겠다고 누구보다 새 하얀 새 빨래가 되겠다고 회개의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그날도 세탁기 속에 웅크려 통성기도를 했다고 한다 주님 제 기도를 들어주세요 저는 거듭나고 싶어요 그녀는 입안 가득 표백제를 삼켰다고 한다 빨래라고는 모르던 그녀의 남자친구가 그날은 신의 얼굴을 하고 와서 찌든 빨래 모드로 전원버튼을 누르고 갔다고 한다 그녀와 그녀의 아기는 비로소 말끔히 세탁되었고 그녀는 새옷만 입는 마네킹으로 환생했다고 한다
김효은 시인 / 무무와 모모에 관한 에피소드
무무의 역할놀이 무무는 오늘 새로운 챕터 엄마를 연습한다 무무는 모모를 입양했거나 낳은 사실이 있다 모모는 세상에 태어났다 분출 혹은 배출되었다고 말하기도 한다 물질이 되었다는 사실만이 자명하게 희다 모모는 자주 붉거나 푸르거나 검붉은 빛의 형상으로 주변에 목격되었다 무무의 역할놀이는 모모를 케이지에 넣는 동작으로부터 시작된다 케이지의 문은 위로만 간헐적으로 열리고 무무는 모모를 밟고 짓이기고 한움큼의 물과 사료를 이따금 주입한다 한겨울 내복 바람에 내쫓거나 한여름 폭염 속 차에 두고 내려도 무방하다 케이지는 기내용 여행 가방으로 대체될 수 있다 보온을 위해 드라이기로 뜨거운 바람을 가방 안에 주입하거나 지문을 지우기 위해 프라이팬을 사용하기도 한다 면역력을 키워주려고 체중조절을 시켜주려고 인내심과 뚝심과 맷집과 절약심과 용기를 길러주려고 무무는 교육열 높은 모성 연기에 몰입한다 연기를 제외한 모든 삶에서 그녀는 미니멀리스트 최소한의 육아에 매진한다 보보는 무무의 남편이다 보보는 무무의 교육관을 전폭 지지한다 따른다 인생은 비용이 많이 든다는 데에 둘은 적극 동의한다 무무와 보보는 모모에게 비용 절감의 법칙을 알려주기 위해 생의 결말을 미리 당겨주기로 한다 무무는 모모에게 작별 인사를 한다 안녕 나를 스쳐간 아가야, 작은 배역이었지만 넌 모모역을 충분히 소화해냈고 연습은 즐거웠고 그동안 고마웠단다 장례식장에서 혼신을 다해 우는 연기까지 무무의 연기는 검은색 드레스와 뿌리염색까지 모든 것이 완벽했다 애도가 끝난 무무는 무료하다 이번에는 인터넷 배너 광고에 시선이 멈춘다 귀여운 강아지 토토 하루 대여비 단돈 3만원 무무는 곧장 전화기를 누른다 무무는 노력형 연기자 곧 대형기획사에서 섭외가 올지도 모른다 무무와 보보와 모모와 토토의 이야기는 인터넷 뉴스 게시판을 달군다 식는다 흘러간다 시작도 끝도 없는 동화가 이어진다 매일 매일 새롭지도 않은 새로운 막이 오른다
김효은 시인 / 단편영화 – 낙조 극장
아침이면 착상되고 저녁이면 계류되는 낙조 상영관이 있다 파도는 능숙한 조산사 시체와 도구를 겹겹이 감추기에 민첩하고 능숙한 손놀림을 가졌다
타인의 고통 연중 무휴 상시 상영 중
배냇저고리 찢긴 조각들 번역되지 않는 자막들 태반으로 만든 마스크팩을 굿즈로 드려요
스크린 여기저기 울룩불룩 이마로 발뒤꿈치로 쿡쿡 꾹꾹 움직이는 포르말린 속 태아들 둥둥 유영하는 팔다리 뻐끔거리는 입모양이 압도적으로 생생한 3D 4D 5D 상영관
1번 씨랜드 2번 팽목항 3번이태원 4번 곤지암 배경 화면은 수시 변경 가능 화재 침몰 압사 심령 체험 원하시는 모드 변환을 누르세요
덜 익은 과일이 맛있다고요? 최신형 리클라이너 의자에 누워 입을 벌리고 낙과를 기다리는 사람들 고통을 포식하는 사람들
비극은 재흥행 한다 비극은 재개봉 된다 찾는 사람이 많으니까
비명보다 질긴 어둠이 엔딩 크레딧으로 내리면 꿀꺽꿀꺽 아귀들도 몰려와 인공 젖을 빤다 거룩한 밤 고요한 밤 수유의 밤 수혈의 밤 갯벌은 신성한 자궁을 상징합니다
낙조 극장으로 오세요 치어 관리 수족관도 운영합니다 D·I·Y 시대 맞춤형 먹이를 직접 양식해서 사냥하고 조리하고 포식하세요 인내심과 긴장감 쫄깃한 식감은 덤이에요 희극과 비극 다큐와 SF 단편과 장편 공포 멜로 스너프 코미디 온갖 장르의 영화들 분할 화면으로 동시 상영 가능
지금 바로 낙조 극장으로 오세요
배우와 감독 투자자도 상시 모집합니다
웹진 『시인광장』 2024년 2월호 발표
김효은 시인 / 설계도
응급실과 원무과는 1층에 있고 수술실과 회복실은 2층에 있다 영안실과 장례식장은 지하에 있고 구내식당과 매점 또한 지하에 있지만 출입구가 완벽하게 분리되어 있다 중환자실이나 호스피스병동은 영안실 인근에 있거나 최고층에 있고 옥상에는 방화문과 헬기 착륙장이 있으나 일반인은 접근할 수 없다 산부인과와 신생아실은 5, 6층에 있지만 축소되거나 사라질 수 있다 중간층에는 그 외 일반병실과 외래진료실이 배치되어 있다 병상의 개수 흑자와 매출이 규모와 인지도를 좌우한다 신경정신과 외래는 2층에 있고 보호병동은 표기없음으로 보호된다 자가용과 대중교통 도보와 구급차를 이용해 도착할 수 있지만 오늘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기약과 보장은 없다 정문 앞 조경으로는 소규모 공원이나 경사로 없는 산책로가 권장되고 바깥 풍경으로는 백화점이나 체육관보다는 네온 십자가나 성모상이 잘 보이는 교회나 성당이 나쁘지 않다 공공장소에 속하므로 통성기도보다 묵상이 어울리고 지리한 희망보다 신속한 체념이 실리적일 수 있다 입관은 한낮의 오후에 발인은 해 뜨기 전에 이뤄지고 조화가 조화로 도착해도 수취인이 불평할 확률은 낮다 증상과 날씨와 예보는 매일 다르거나 같고 맞거나 맞지 않고 절기와 계절은 한 방향으로 흐르면서 교체된다 모든 설계와 배치는 내외부 사정에 따라 조정 또는 변경될 수 있습니다 -계간 『시산맥』 2024년 여름호 발표
김효은 시인 / 노이즈 캔슬링
소화기 방독면 완강기 호신용품 안전핀을 해제하기 전까지는 그 일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불량 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는 것들 새것인 그대로 낡아가야만 처음의 관계를 유지해야만 안전한 것들이 있다 너무 크게 사랑해를 말해서 한 사람은 고막이 터지고 너무 세게 껴안는 바람에 한 사람은 어깨와 흉추가 멍들고 부러졌다 헤어져란 말은 인화물질로 분류되어야 한다 이따금 방화의 주범이 된다 고층이거나 엘리베이터 안과 같은 밀폐된 곳에서는 함부로 말하지 말 것 오피스텔 복도에서 거리에서 살려주세요 누구 없어요 소리쳐도 아무도 모르는 일 쿵 하고 나무가 쓰러져도 소리가 들리겠는가 안 들리겠는가 -계간 『창작21』 2024 가을호 발표
김효은 시인 / 조문, 서래*에게
어떤 국화는 노랗게 태어났지만 흰 국화가 된다 영정 앞 창백한 미망인의 얼굴 그녀가 미인이라면 조문과 위로는 희석된다 의혹은 매혹에 흡수되고 당신의 일부 때로는 당신의 전부가 붕괴된다 검은 벨벳 모자와 망사장갑 이니셜이 수놓아진 흰 손수건은 오로지 그날을 위해 준비된 것 그녀의 기다란 속눈썹에 매달린 인공 눈물이 촉촉하게 반짝이다가 또르르 떨어진다
장례식장은 외진 곳에 숨어 있지만 납골당은 트인 곳에 캐슬이라는 이름을 달고 웅장하게 서 있다 잡골당 건물의 외벽 유리창이 유난히 깨끗하고 투명한 것은 전광판이나 간판을 대신하기 위함이다 멀리서도 반짝이는 이정표는 사후를 유인한다 새들은 매일 유리창에 비친 모조 하늘로 날아와 부딪힌다 죽는다 쌓인다 주검을 치우는 사람의 손끝에서 달력은 교체되고 어둠은 짙어진다.
삼우제의 오후 낙엽에 불을 지펴 상복을 태운다 재가 날리고 만추가 저문다 면사포 닮은 상강 지나 유골 같은 흰 눈 내린 대설 지나 유독 살이 올랐던 만월이 지면 동지가 온다 까마귀를 먹고 길고양이를 먹고 심장을 땅에 묻고 밟아주면 화색 돋는 해는 모가지가 길어지겠지 피 묻은 창을 닦고 서쪽으로 난 유리문을 닫으면 동쪽에서 새로운 당신이 날아온다 구름처럼 파도처럼 밀려오는 날개의 기류를 느낀다 풍속을 즐긴다 바다 냄새를 잔뜩 묻혀온 새의 목을 힘껏 끌어안았다가 푼다 교살을 보류한다
어떤 겨울은 가을보다 먼저 시작된다는 그런 글조각을 달력에 새긴다 어떤 이별은 만남보다 먼저 시작된다는 작년의 글조각은 편집되었다 12월의 어느 아침이다 미망인이 거울을 보며 입술을 다물었다가 편다 턱선을 낮추며 글썽이는 표정을 연습한다 사십구재에 입을 드레스코드를 생각하며 천천히 창가로 다가선다 레이스 커튼을 젖히고 창문을 연다 손차양을 한다 반지 자국이 하얗게 빛난다
*박찬욱 감동의 영화 <헤어질 결심> (2022)의 여주인공 이름
-월간 《현대시≫ 2023년 1월호에서-
김효은 시인 / 완벽한 시월을 위한 삼중주 얇은 네트형 커튼 사이로 햇살이 쏟아진다 오후의 빛 고운 입자들이 흔들리며 체망에 투과된다 유리창을 뚫고 커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의 음영들 더러는 바닥으로 미끄러지는 그림자의 미늘들이 언젠가 미용실 바닥에 툭 떨어진 머리칼 같다 헝클어진 빛들 뒤엉킨 기억들은 아무리 쓸어 담아도 파편들을 남긴다 눈보다 부신 마음의 모서리 위로 블라인드 줄을 당긴다 작은 간이 테이블엔 푸른빛의 안개꽃이 에스프레소 잔에 이식되어 있다 방금 추출된 커피의 표면 위로 익숙했던 온도가 빛의 예각 사이로 날아간다 라떼에 덧그려진 잎사귀의 거품들이 수군거리며 손끝에서 일렁인다 터져 오르던 기포들 잦아들고 마주 앉은 당신의 얼굴이 길어진다 깊은 수로가 생기고 동공에서부터 흘러내리는 두 줄기의 정적이거나 어둠 그 간극 사이로 시월이 켜진다 무소음 시계의 초침은 오로지 묵음만을 위해 쉬지 않고 돌아간다 방향과 높낮이를 바꿀 수 없는 진로들이 단호한 음정을 낸다 나와 당신은 하나의 벽을 향해 호흡이 부지런해진다 드리워진 블라인드 너머로 해가 기웃거리며 이운다 서로가 침묵을 멈추거나 멈추지 않은 채 초조함을 감추려 기색한다 눈길의 각도와 손놀림 마른기침조차 겹치지 않게 조심스러운 규칙만을 주고받는다 시선과 몸짓은 살짝 비껴있어야 미안함과 어색함이 줄어든다 카운터 너머에서는 포트에 침묵이 끓고 때마침 탁 하는 기계음에 열이 차단된다 누구도 방해할 수 없는 연주가 클라이막스를 향해 치닫는다 이따금 시야를 흐리는 건 지난밤 꿈의 잔상이거나 창밖으로 날리는 낙엽들 열차의 머리와 꼬리가 분리된다 잘린 꼬리는 다른 머리가 되어 갈라진 선로에서 우회한다 약간의 시차를 사이에 둬야 제동이 쉽다는 듯 꼬리가 멈칫하며 엷게 고개를 흔든다 나중에 나서는 꼬리는 먼저 나선 머리의 뒷모습과 그림자의 방향을 기억해야 한다 향취와 동선이 겹치지 않게 맞은편으로 걸어야 한다 망각을 위해 기억은 총동원된다 맥박처럼 뛰는 메트로놈 소리에 보폭을 맞춘다 오해하지 않도록 돌아보는 일조차 없어야 한다 숫자 12와 6 사이 직선을 내리그으며 어떤 운명 하나가 반원과 반원을 이루며 만개한 꽃처럼 갈라진다 정확히 오른쪽과 왼쪽으로 각자 원점에서 최대한 멀어지면서 디미누엔도 우리는 점점 작아진다 카페의 위치는 대로변과 나란히 있을수록 알맞다 쉽사리 연민에 빠지거나 계절감에 경도되어 직진으로 뛰어든다면 차에 치여 죽을 수도 있다 부주의한 당신이라면 애당초 골목 깊숙이 위치한 작은 찻집을 고르는 게 안전하다 미로 속의 계절 오직 시월만이 조금의 길도 잃지 않고 중순을 지나 하순으로 간다 저무는 것들과 길을 더듬는 것들만이 잘게 부서져 더 눈부시다 하늘은 유난히 맑고 노을의 각도와 채도는 절묘했다 카페의 실내온도와 습도 의자에 놓인 패브릭의 질감까지 적당히 부드러웠다 바깥의 풍향과 풍속 밟히는 낙엽의 바스락거림도 알맞았다 신호등이 없는 방향으로만 한동안 걷다 보면 서로 다른 가로등이 하나 둘 점등될 것이고 서서히 내려온 밤은 각자의 등 뒤에서 서걱서걱 오후의 잔영을 마디마디 쳐낼 것이다 일기 예보에 내일은 상강* 약간의 서리가 내릴 예정이며 미세먼지는 보통이라고 한다 산간 지방에는 더러 얼음이 어는 곳도 있을 거라 한다 숨을 고르고 페이드 아웃 이별이 시월의 악장을 완성한다 *상강(霜降): 24절기 중에 18번째 절기. 아침과 저녁의 기온이 내려가고, 서리가 내리기 시작할 무렵 -계간 『시와 경계』 2021년 봄호 발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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