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성택 시인 / 다운로드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5. 21:50

윤성택 시인 / 다운로드

 

 

어느 먼 생각이 깊어져

봄꽃들이 핀다고

그렇게 믿은 적이 있다

 

잎잎의 주파수를 열어놓고

가혹한 지구의 들판에서

뿌리가 흙 속을 가만히 더듬을 때

 

화성에는 탐사로봇 스피릿이 있다

다 닳은 드릴이 바닥에서 헛돌고

무섭게 휘몰아치는 돌풍이 불어와도

교신을 끊지 않는다

 

카메라 속 황량한 표면,

암석의 촉감이 데이터로 읽혀온다

길을 걷다 문득

까닭 없이 꽃을 만져보고 싶다

 

아무 생각이 나질 않고 다만 멍하니 멈춰

나는, 송수신이 두절된 탐사로봇처럼

결함을 복구하느라 껐다 켰다를 수십 번 반복하는

누군가를 떠올려본다

 

꽃의 향기에 취해 아뜩한 내가 들여다보는

나의 마음은 누구의 선택이었을까

 

햇볕이 내리 도달하는 이 봄날,

다운로드 되듯 옮겨온 생각이

혼연일체의 새순에 듣는다.

 

 


 

 

윤성택 시인 / 여행, 편지 그리고 카메라

 

 

나는 당신이 알지 못하는 지도 어디쯤에서

한쪽 눈을 감고 이곳 장면을 저장해 간다

 

배터리가 다 된 핸드폰을 끄면 아늑한 무덤이다

 

어느 민박집에 두고 온 칫솔이 잊혀지지 않는다

칫솔모가 눌린 채 닦아내고 있을 한때의 적요

 

과속 방지턱이 다가올 때마다 글자는 삐걱거리지만

물결 소인消印처럼 수첩은 어디론가 페이지를 열어 둔다

오래된 소읍에서는 바람이 묵어간 뒤뜰에도 수취인이 있다.

떠나지 못한 날들 속에서 문장은 위독해지고

카메라는 나의 한쪽 눈을 목록으로 만들 것이다.

차창 커튼을 스치는 소리는 여행의 첫 줄

누군가 뒤척인다

다가오는 나무들은 저를 흔드는 바람에

빛을 털어내다 뒤편으로 사라져간다 요약하면

어떤 간이역에서는 그늘과 슬픔을 구별하지 못한다는 것

내 눈으로 바라본 희붐한 새벽을 편지라 명명할 때

그 주소는 아무도 가보지 않은 시간의 오지다

 


 

윤성택 시인 / 외출

 

 

햇볕이 유리창에 착 붙어

온기가 전해지는 아침,

노인은 무릎에 파스를 붙이며

외출을 준비하고 있다

고무줄로 묶인 파스다발이

약상자에서 솔솔 냄새를 낸다

우표 한 장의 힘으로

편지가 배달되듯

파스 한 장의 힘으로

가뿐히 몸을 일으켜 세운다

세월의 내력이 적혀진 몸에

겉봉 같은 외투를 걸치고

어디든 갈 수 있다고, 어쩌면

아름다운 그녀를 위해

그리움을 봉하고 제 몸에

우표를 붙였는지 모른다

중절모 쓰고 지팡이 짚고

대일파스 후끈후끈하게

붙은 봄날, 환한 골목에서

노인이 걸어 나오고 있다

 

 


 

 

윤성택 시인 / 담장과 나무의 관계

 

 

담장 틈에서 나뭇가지가

가늘게 몸을 떨었다

아주 천천히 금이 자라도 좋았다

바람조차 알 수 없는 금의 방향은

담장의 천형이었다 견딘다는 것은

상처를 제 안에 새기는 것이다

담장 곳곳 나무의 실뿌리가 번졌다

그 틈으로 수액처럼 물이 올랐고

바람 불 때마다 조금씩 흔들렸다

혹독한 겨울을 지나면서

나무는 말라가고 있었다

날이 풀리자 담장은 기어이

금 밖으로 무너져 내렸다

나무가 활짝 몸을 열었다

검은 금들이 가지로 뻗어 올랐다

 

 


 

 

윤성택 시인 / 정류장

 

 

이 눈부신 햇빛의 제목

잎잎은 승차권 같은 바코드를 잎맥에 입혀 환승중이다

 

실눈이 좁게 우회하는 길 밖으로 꽃들을 부빈다

서로에게 흔들리면서 목걸이처럼 찰랑이는 오후

정류장은 종일 누군가를 기다린다

 

오래전 빗방울 습기 한 점이 나였던 적이 있다

나는 그곳을 다녀간 내 수많은 성향이다

햇빛은 습기를 공중에 적는다 기억할수록

점점 타인이 많아진다

 

버스에 올라 정류장 푯말을 바라볼 때

텅 빈 시간의 기압에서 느껴지는 비의 냄새,

어느 길에서는 먹빛 구름이 차창이다

 

사랑에 대해 점괘를 확신하고 있으면

정류장에서 그날은 비가 내린다

 

 


 

 

윤성택 시인 / 가령 영하라는 사람에 대한 이야기

 

 

지금 날씨는 어느 냉장고 속입니다

한 여름날 영하를 떠올리듯

이 저온을 유지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날들이

플러그를 꽂고 있는 걸까요

왠지 모를 그리움이 설핏 껴오는 게

이 추위의 겉봉입니다

밤에 편지로 어두워본 적 있는 사람은

당신의 배후를 동봉한다는 것입니다

편지지를 구겨버리고 새로 꺼내

한 줄마다 심장의 피를 흘려보낸 적 있습니다

몇 줄 지나고 나니 사연에 혈색이 돌고

나는 점점 새벽으로 창백해져갑니다

나는 당신에게로 생각이 입혀지다가

당신 안으로 나를 들여놓습니다

북향의 자취방 작은 창으로 깃든 빛줄기를

여기에 적습니다, 가령 영하는 그날의 체온입니다

필체를 나눠가진 주말은 갔고

그날은 푸른빛으로 인화되는 소인입니다

날마다 나는 영하처럼 어디론가 흘러갑니다

 

 


 

윤성택 시인

1972년 충남 보령 출생. 2001년 <문학사상>에 「수배전단」으로 신인상을 수상하며 데뷔. 시집 『리트머스』(문학동네,2006), 『감(感)에 관한 사담들』(2013). 한국 시인협회 2014년 올해의 젊은 시인상을 수상. 2019년 제9회 <시와 표현> 작품상 수상. 현재 문화예술마을 헤이리 사무국 근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