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안영 시인 / 좋은 날 외 5편
선안영 시인 / 좋은 날
한 방울 젖을 찾듯 옛 주조장을 찾아간다 봄바람 불어와 누룩 섞인 꽃들 피고 술 없는, 외로운 봄날은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만다라 뿌리 숨은 빈 들길 가는 동안 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엎지르며 웃음의 모종을 사러 간다 물이 불로 번지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물금 낮아 흐린 날들 구름마다 산수유 꽃 취기 일어 피어오르고 낮달은 양은 술잔처럼 찌그러져 찾아온다
선안영 시인 / 칼날이 지나간 장미 한 송이
살아남은 꽃을 팔아 새 잉크를 사야지 저 붉음을 꽃피우는 샘물처럼 퍼 올려 꽃부리 씨방 속에다 불여시를 숨겨야지
눈부처 깜박 잊고 깜박 다시 태어나야지 꽃잎을 죄 짓찧어 가시 찔려 피가 도는 운명의 칠흑을 벗기고 젖족을 벗겨야지
죽고 살고 야릇한 야성을 지어야지 치마폭에 기적을 보쌈 해 살아보려 무두질 담금질 잘 된 칼날을 낳아야지
-《시조21》 2022. 겨울호
선안영 시인 / 반쯤 열린 문
몸이 몸을 나누어 첫눈 내려 쌓인다 살얼음 낀 숨소리로 혼자를 연습하며 겨울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슬픔들
눈꽃은 틈이 많아 허공에 흩날리고 마무친 두 주먹의 아귀힘을 풀면서 멀어서 더 그리워진 기억이 피어나고
죽어 멈춘 시계에서도 시간은 흘러나와 불면의 귀를 찾아 접자해도 귀가 없어 세상을 온몸으로 굴러 눈사람이 탄생한다
-《시조시학》2022. 겨울호
선안영 시인 / 그러니까 해피엔딩
어릴 적 발등 위로 독사가 지나갔다
대낮의 능금 몇 알 붉은빛 불이 들 때
얼음 든 칠흑을 봤다, 비명 없는 천둥으로
거두절미한 한 획으로 꾸역꾸역 배를 밀며
미문에 밑줄 긋듯, 옻칠에 피를 섞듯
긴 터널 허물을 둘러쓴 기차가 지나갔다
서녘들이, 그믐들이, 공포들이 지나갔다
흰 발목 휘감았던 독 오른 똬리를 풀 듯
어둠이 칭칭 동여맨 아침 달을 놓아주듯
-시조집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에서
선안영 시인 / 초록 뱀
불도 없이 끌고 갈 한 량뿐인 기차라니 환상이 환장이 된 적도 없는 불화라니 '길다'는 슬픔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라니
꽃무늬 주름에 갇힌 영혼은 모르는 일 기대지 않을수록 기다리지 않을수록 흉물의 허물을 벗어 모르는 내가 되지
놓아 주실 거라면 연두 속에 놓아주실,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할 때까지 백지의 마음을 얻으려 발 뒤꿈치를 물 때까지
선안영 시인 / 설원을 마주한 저녁
저 흰빛을 나 차마 감당 못하겠어요.
나는 흰 호청의 요 위에 붉은 꽃잎 피울 수가 없고, 흰종이에 이 세상 밤과 낮을 띄울 수가 없고, 너무 늦고, 너무 늙어 잎이 아닌 가시뿐인 걸요. 봄은 빈말 건네다 갔고요. 여름은 잠 밖으로, 가을은 긴 마취 중에 자연 지나갔으 니, 얼룩무늬 외투를 껴입은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나, 타인의 씨방을 훔 쳐 겨울보다 더 겨울을 살았나 봐요. 이제 부신 저 눈밭을 오래 굴러 기억보 다 몸 나가는 죄를 삭이고
어디에 표류할 줄 모르는 물병편지를 띄웁니다.
겨울은 나를 낳아준 친 아버지 같아서 눈길 위에 반지랍도록 눈사람을 굴리며
거듭 나, 숨을 끌고서 당신께 살러 갑니다.
-시집 『거듭나, 당신께 살러 갑니다』, 발견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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