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선안영 시인 / 좋은 날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6. 19:33

선안영 시인 / 좋은 날

 

 

한 방울 젖을 찾듯 옛 주조장을 찾아간다

봄바람 불어와 누룩 섞인 꽃들 피고

술 없는, 외로운 봄날은 어둑어둑 소금 피고

 

만다라 뿌리 숨은 빈 들길 가는 동안

쏟아질 듯 기우뚱 탄식도 엎지르며

웃음의 모종을 사러 간다 물이 불로 번지도록

 

물 빠진 저수지 같은 물금 낮아 흐린 날들

구름마다 산수유 꽃 취기 일어 피어오르고

낮달은 양은 술잔처럼 찌그러져 찾아온다

 

 


 

 

선안영 시인 / 칼날이 지나간 장미 한 송이

 

 

살아남은 꽃을 팔아 새 잉크를 사야지

저 붉음을 꽃피우는 샘물처럼 퍼 올려

꽃부리 씨방 속에다 불여시를 숨겨야지

 

눈부처 깜박 잊고 깜박 다시 태어나야지

꽃잎을 죄 짓찧어 가시 찔려 피가 도는

운명의 칠흑을 벗기고 젖족을 벗겨야지

 

죽고 살고 야릇한 야성을 지어야지

치마폭에 기적을 보쌈 해 살아보려

무두질 담금질 잘 된 칼날을 낳아야지

 

-《시조21》 2022. 겨울호

 


 

선안영 시인 / 반쯤 열린 문

 

 

몸이 몸을 나누어 첫눈 내려 쌓인다

살얼음 낀 숨소리로 혼자를 연습하며

겨울의 그물 사이로 빠져나가는 슬픔들

 

눈꽃은 틈이 많아 허공에 흩날리고

마무친 두 주먹의 아귀힘을 풀면서

멀어서 더 그리워진 기억이 피어나고

 

죽어 멈춘 시계에서도 시간은 흘러나와

불면의 귀를 찾아 접자해도 귀가 없어

세상을 온몸으로 굴러 눈사람이 탄생한다

 

-《시조시학》2022. 겨울호

 

 


 

 

선안영 시인 / 그러니까 해피엔딩

 

 

어릴 적 발등 위로 독사가 지나갔다

 

대낮의 능금 몇 알 붉은빛 불이 들 때

 

얼음 든 칠흑을 봤다, 비명 없는 천둥으로

 

거두절미한 한 획으로 꾸역꾸역 배를 밀며

 

미문에 밑줄 긋듯, 옻칠에 피를 섞듯

 

긴 터널 허물을 둘러쓴 기차가 지나갔다

 

서녘들이, 그믐들이, 공포들이 지나갔다

 

흰 발목 휘감았던 독 오른 똬리를 풀 듯

 

어둠이 칭칭 동여맨 아침 달을 놓아주듯

 

-시조집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에서

 

 


 

 

선안영 시인 / 초록 뱀

 

 

불도 없이 끌고 갈 한 량뿐인 기차라니 환상이 환장이 된

적도 없는 불화라니 '길다'는 슬픔으로만 이루어진 세계라니

 

꽃무늬 주름에 갇힌 영혼은 모르는 일 기대지 않을수록

기다리지 않을수록 흉물의 허물을 벗어 모르는 내가 되지

 

놓아 주실 거라면 연두 속에 놓아주실, 한 방울의 맹독을

완성할 때까지 백지의 마음을 얻으려 발 뒤꿈치를 물 때까지

 

 


 

 

선안영 시인 / 설원을 마주한 저녁

 

 

 저 흰빛을 나 차마 감당 못하겠어요.

 

 나는 흰 호청의 요 위에 붉은 꽃잎 피울 수가 없고, 흰종이에 이 세상 밤과 낮을 띄울 수가 없고, 너무 늦고, 너무 늙어 잎이 아닌 가시뿐인 걸요. 봄은 빈말 건네다 갔고요. 여름은 잠 밖으로, 가을은 긴 마취 중에 자연 지나갔으 니, 얼룩무늬 외투를 껴입은 동명이인(同名異人)으로 나, 타인의 씨방을 훔 쳐 겨울보다 더 겨울을 살았나 봐요. 이제 부신 저 눈밭을 오래 굴러 기억보 다 몸 나가는 죄를 삭이고

 

 어디에 표류할 줄 모르는 물병편지를 띄웁니다.

 

 겨울은 나를 낳아준 친 아버지 같아서

 눈길 위에 반지랍도록 눈사람을 굴리며

 

 거듭 나, 숨을 끌고서 당신께 살러 갑니다.

 

-시집 『거듭나, 당신께 살러 갑니다』, 발견 2018

 

 


 

선안영 시인

1966년 전남 보성에서 출생. 조선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 2003년 경향신문 신춘문예 시조 당선 등단. 시집 『초록몽유』 『목이 긴 꽃병』. 시조집 『말랑말랑한 방』 『저리 어여쁜 아홉 꼬리나 주시지』 등. 제7회 전국 금호시조 대상을 수상. 2008년 중앙시조대상 신인상 수상. 2009년 무등시조문학상 수상. 2011년 서울문화재단 문학 창작기금 받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