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현협 시인 / 유형지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7. 17:49

이현협 시인 / 유형지

 

 

안개를 빠져나온 뭉게구름 목화송이처럼 피었지

살아있다는 건 도려내다 지친 발바닥에 박혀버린 티눈처럼

수정되지 않아 염천에 날개가 돋아나는 밝은 모퉁이 악성 종양처럼

퍼지는 감정을 미행하며 벌거벗은 웃음을 압축하는 파랑 장갑들

 

파쇄 당한 욕심에 우그러진 우울한 몸짓

 

 


 

 

이현협 시인 / 유년, 그 허리춤을 세우며

 

 

유년이 떠나고 바짓가랑이에 차오르는 쓰라림을 껴안아야 했어.

가눌 수 없는 목을 누군가에 의해 잡힌 채 낯선 거리에서 나는

수시로 나부끼고, 수취인 불명의 내 이름은 아무 곳에도 수신되는 데가

없었어. 차디찬 지하 세모에서 미세한 내 영혼은 종일 덜컹거렸어.

닫혀진 지하도의 입으로 내 목적의 쓰라림은 한겨울처럼 깊어져만 가고

어둑어둑한 속뼈를 수선하며 나는 내 허리춤을 세우곤 했어.

내 푸른 뼈는 늘 허무러질 테세의 위기 앞에 놓여 있었어.

 

-2006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신인상 작품

 


 

이현협 시인 / 낯선 가르마들

 

 

 첫새벽부터 기다리는 막차는 오늘도 연착이지 기찻길 옆 저탄장에 누워 부채과자를 그렸지 비틀거리는 오류(誤謬)를 횡단하여 품어온 꼬냑, 시가 보따리 어슴새벽부터 풀었지 시가를 문 사람들 체 게바라 흉내를 내었지 팔뚝만한 바나나를 먹을 줄 몰라 쩔쩔매었지 웃음 사라진 마당 빈 병, 담배 냄새가 수북했지 붉은 집에 두고 온 맨정신을 찾아 사나흘 방 문이 잠긴 동안, 툇마루에 풋사과, 표고, 오미자, 꽈리들이 쌓여갔지 어둠에 서성이던 낯선 가르마들이 사라진 후 시퍼런 수의(囚衣)는 점점 살갗을 파고들었지 시커먼 개울가 쑥부쟁이 웃던 밤 노란 주전자 비워갈 때, 낡은 트랜지스터를 순례하는 멍든 시간은 울지 않았지

 

- 계간 《시사사》 2021년 겨울호에서

 

 


 

 

이현협 시인 / 다시 호출이다

 

 

 매화틀을 잃어버린 맨발들은 초면이 아니었다. 미아가 된 문패들은 발정 난 삭임 틀에 포로가 되어 꽃무덤을 만들었다. 패인 살갗을 파고드는 꽃멀미에게 알사탕을 던져 주었다. 심지를 움켜진 호롱 같은 손이 꽃무덤을 쓸어내렸다. 벌목당한 문신에 잡초만 뽑아내다 짓무른 정원사는 정든 폐허를 짊어지고 다시 소화불량에 걸린 거리로 나섰다. 백치의 변기에 성수가 차오르고 달창난 꽃물을 지워간다. 고장 난 음계에 걸려 옴짝달싹 못하는 아, 꽃의 잔해

 

 


 

 

이현협 시인 / 우울한 귀족

 

 

어둠에도 죽은 척 하는 똥파리 무지근한 담벼락을 서성인다

나사 풀린 목을 지나 코르셋 벗은 몸통, 꺾어진 둔부는 정갈하다

천국으로 가는 열쇠도 없이 버려져, 큰 발자국들이 얼굴을 짓뭉갰다

어디선가 마르고 오그라들어 썩어갈, 영혼들에게 라크리모사*를 바친다

텅 빈 진열창 누비는 발칙한 구두소리, 섣부른 소문에 모여든 우울한

까치발, 살아남은 혀를 말아 올리는 겹눈이 시퍼렇다

 

*라크리모사-모차르트:레퀴엠

 

 


 

 

이현협 시인 / 한 뼘의 나라

 

 

 차가운 입맞춤이 끝나고 하얀 버스에 열쇠를 두고 내렸다 파란 풀들이 검은 네모를 에워싸고 치열했던 경이로움은 한 뼘 이름으로 남았다 빗속에 막걸리 한 잔 올리고 빗방울 삼키는 남은 자국들은 허우적거리며 열쇠구멍만큼의 빵을 찾아 마른 땅을 다시 뛰었지, 반짇고리를 품어 오지 않은 날부터 등잔 아래 엄마처럼 양말 구멍을 메우지도 않았다 거꾸로 매달린 속보들의 뒤란에서 단 일초의 까치발도 허용하지 않는다. 음표가 숨어버린 네모의 나라로 가는 길은 신호등이 없다 사철 염천에든 분노를 접속해야한다 지문이 지워지는 것도 모른 체

 

 


 

이현협 시인

경기도 포천 출생. 2004년 《시현실》, 2006년《시를 사랑하는 사람들》로 등단. 현재한국시인협회 회원, 시사사 회원, 시산맥 회원. 한국시인협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