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형로 시인 / 늙은 사자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8. 15:20

김형로 시인 / 늙은 사자

 

대학병원 수납 창구 앞

얼굴에 저승꽃 만발한 노인이 옆의 아내에게 소리를 지른다

다른 사람은 돈 있으니 수술하는 거지!

 

꿈쩍 놀란 눈총들이 일제히 꽂히고

번호표 든 여자들 수군거린다

말없이 바라보는 남자들 속에서

이해합니다 아버님, 나는 고개 숙인 채

젖은 눈으로 아버지를 닦는다

 

그는 한때 태풍 속이라도 걸어 들어갔을 가장이었으리

바위만큼 단단했던 숫사자 시절이 있으리

옛말에 사내는 돈 못 벌면 숟가락 놔야 한다 했지만

요즘 어느 사내가 사자처럼 사는가

고양이 소리로 방안 골골거리며

미운 정 고운 정이란 이름의 애완으로 살지 않는가

그래도 솔가한 본능은 살아남아 저리 으르릉거리는 것이다

 

폐 끼치고 갈 수 없다는 수컷의 칼칼한 성질, 그러나 갈기 다 빠진

늙은 사자의 눈물나는 포효, 자식에 몰빵한 식민과 전쟁세대의 쓸쓸한 퇴장

 

수술해라, 안 한다, 몇 번 옥신각신 하다가

마지막 사자후가 농한 감처럼 퍽, 바닥에 터진다

죽어도 내가 죽지 니가 죽나!

​​

- 시집 『미륵을 묻다』에서

 

 


 

 

김형로 시인 / 조용히 기차를 탄다

 

 

그 무렵 우린 통일호를 탔다

기껏 서울까지 가려고

거창하게 통일호에 올랐다

 

한반도의 반밖에 가지 않았지만

한 명도 빠짐없이 내렸다

누구도 다음 역을 묻지 않았고

아무도 통일호에서 통일을 생각하지 않았다

 

서울이라는 가짜 종착역에 내려

아직 힘이 남은 듯 씩씩대는 열차를 남으로 돌려보냈다

그 열차 타고 감히

북으로 가자고 했던 사람이 있는가

 

이기형 시인은

백두산 귀향 표를 살려는 놈이 미쳤나

기어이 못 팔게 하는 놈이 미쳤나, 일갈했고

임수생 시인은 술 취해 택시 타면

기사 양반 평양 쫌 가입시더, 소리쳤다

 

기개 있던 시인들 가고

통일은 먼 나라에서 온 거짓말 같은 말이 되고

38선 한 번 뚫지 못한 채

쇳소리 산천을 울리던 철마는 퇴역했다

 

평양 개성 신의주 원산 함흥

이정표 사라진 역두에 우두커니 서서

 

미치지 않았으니

서울까지 가는 것도 고마워

휴대폰으로 표 끊고 조용히 기차를 탄다

당연한 최북단 서울까지만 간다

 

―《내일을 여는 작가》, 2023년 여름호

 


 

김형로 시인 / 북향 매화

 

 

응달의 매화

춘분 며칠 앞두고 겨우 터졌다

남쪽 언덕 목련 개나리 다 피고 질 때쯤

끝물의 봄,

이제부터 갖고 놀겠다는 여유라고 할까

터질 것은 터지는데 사람이 조급한 것이다

삼월 되니 북향에도 냉이가 퍼지고 있다

조금 늦었을 뿐이다

해가 높이 솟으면 어디든 여름은 오고

산 그림자 길어지면 겨울은 맵다

이슥한 어둠이 저를 돌아보게 한다던가

북향 밭의 것들은 작아도

차지고 향 깊다

오래 누린다든가 높게 오른다든가

남녘 일들은 잊은 지 오래

암암한 향기로 남고 싶은

북향 밭 북쪽으로 벋은 가지

자주 귀가 간다

 

-시집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 2021.상상인

 

 


 

 

김형로 시인 / 나이테,  끄응

 

 

꽃을 피우는 데는 엄청난 에너지가 든다고 한다

 

그렇겠지 새끼를 내는 일이 수월할 순 없겠지

한 해 한 번 아랫배 힘을 주면서

꽃숭어릴 달 때

끄응~하며 웅근 소리로 밀어내겠지

 

꽃을 일제히 미는 것은

일개 가지들이 감당할 일 아니어서

나무는 온몸 부르르 힘을 주는 거겠지

끄응, 동심원의 파장으로

밑둥치부터 우듬지까지 앓는 거겠지

 

몸피가 굽이치다 수피를 찢고

비명이 꽃으로 활짝 터지는 거겠지

파동 속으로 잦아드는 몸통

그제사 괄약근의 창은 동그랗게 닫히는 거겠지

 

힘쓸 때마다 괄약하게 써 놓은

온몸의 둥근 나이테

끄응

 

 


 

 

김형로 시인 / 짓

 

 

전에는 손이 좋았는데

이젠 손짓이 좋아

눈보다 눈짓이. 몸보다 몸짓이...

 

사는게 모두 짓이더라고

 

손짓 눈짓. 몸짓을 위한 것이었는데

그것도 모르고 손과 눈과 몸만 쳐다보았지

옷도 밥도 집도 다 짓이던데 말이지

 

존재는 짓 속에 있고

떨어져 나간 것. 부스러기 같은 것들이

종종 뜻을 짓더라고

 

사람이 기억하는 건

손이 아니라 손짓. 눈이 아니라 눈짓

 

아름다운 몸짓은 몸보다 얼마나 더 뜨겁더냐고

 

 


 

 

김형로 시인 / 쓸쓸한 나라의 씁쓸한

 

 

혼자 먹는 밥은 동굴만큼 어둑해서

밥 한술에 국물 한술

내 몸의 기나긴 울력은 갈상상하다

 

동탯국은 맛 있었던가

자작한 국물. 마저 마시려 기울이다 미끈.

내 입에 부딪힌 또 다른 입 하나

 

순간 본. 우명한 구멍

 

얼었다가 끓었다가 육신은 이산離散하고,

아직 볼 것이 남아 있다는 눈인가

닫지 못한 입과 쓸 만한 이를 번득이며 다가온.

검고 긴 한 생의 입구

 

그 입들. 먹고 산 구멍들.

그 어둑한 허기들.

너나 나나 한줄기 컴컴한 생이라는

 

쓸쓸한 나라의 씁쓸한.

 

 


 

김형로 시인

1958년 경남 창원 출생. 본명: 김형수. 부산대학교 경제학과 졸업. 2017년 ≪시와표현≫ 신인상과 2018년 ≪국제신문≫ 신춘문예 당선. 전 ≪부산일보≫, ≪경향신문≫ 기자. 현재 한국작가회의, 부산작가회의 회원. 부산시인협회 회원. 시집 『미륵을 묻다』 『백 년쯤 홀로 눈에 묻혀도 좋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