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황명자 시인 / 쉰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8. 15:32

황명자 시인 / 쉰

 

 

협곡이다

너무 깊고 높고 복병까지 숨어 있어

건너기 힘든 골짜기다 지금껏 달려온 시간들

한순간에 멈추게 하는 낭떠러지가 여기, 있다

쉰에 본 자식 탓에 살맛난 아버지,

일곱 남매 독차지한 덕에

살 목표가 생긴 엄마,

그것도 희망이라고 평생 놓지 않았다

쉰에는 온갖 풍파가 도사린다

끝끝내 출산을 거부한 나는

회개하듯

백이십 그램 자궁을 들어내고서야

가볍게 쉰을 맞는다

새록새록 떠오르는 기억들은

희망보다 숙명에 가까워서

넘기 힘든 언덕처럼 아주 힘겹게 오지만

쉰은,

나이만큼 울창한 고뇌의 숲을 만든다

 

 


 

 

황명자 시인 / 흰 동백

 

 

이십여 년 훌쩍 저쪽 사람이다

뚝 끊어진 근황에

구설수가 오르락내리락했지만

이미 저승길 가고 있는 사람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문상만 하고 올까,

그간 뭘 하며 살았는지

죽은 뒤의 만남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애잔한 맘은 줄어들고 부담만 늘어가는데

대학병원 장례식장 담벼락에 늙은 흰동백 한 그루

내 맘 읽기라도 한 듯 물끄러미 바라본다

소복 입은 여자들, 햇볕 쬐러 나왔는지

흰동백꽃처럼 창백한 얼굴로 서성인다

 

아침 햇살에 차츰차츰 희석되어가는 기억들,

바람에 떨어져 날리는 흰동백꽃잎 따라간다

아침햇살로 소복 입은 여자들도

제 갈 길로 가버리고

장례식장 가는 길은 저승길보다 멀어진다

 

-시집 <자줏빛 얼굴 한 쪽>에서

 


 

황명자 시인 / 뭔 걱정

 

 

신기하다 요술램프 같다

텃밭 두어 평에서

이렇게 많은 작물들이 샘솟듯 나올 줄이야

분양받은 텃밭이 내 땅이라도 된 듯

온갖 채소 다 심어놓았다 그러고 보니

평생 내 땅 한 평 가져보고 싶은 게 소원이라던

누군가가 생각난다 죽고 나면

몸 누일 땅 한 평 없다고 서러워하는데

부질없는 욕심이다

채소들은 제 땅인 양 불쑥불쑥 올라와

쑥쑥 자라서 먹거리로 온몸 바친다지만

죽은 사람 몸이야 쓸모가 있나

텃밭 가꾸듯 살아생전 후회 없이 보내다가

몸뚱이 하나 빨래 털 듯 훌훌 털어 보내면

그만이지 뭔 걱정!

 

 


 

 

황명자 시인 / 사랑이라는 감정

 

 

짓물러져서 지워지지 않는 얼룩처럼

긴 치맛단에 꽃물 들여놓고

가버린 봄처럼

아련하고

속상하고

그립게 하는 감정이거나,

평생 흘레 한번 붙지 못하고

죽을 날 받아 놓은

늙은 개의 감정이거나,

꽃져서 서운한 듯 미리 위장한 채

속내 감추고 마는 추억이거나,

뻔하고도 흔한 신파극처럼

순식간에 끝나버려서 아쉬운

첫날 밤 같은 것이거나,

복사꽃 흐드러진 봄날이면

굳이 떠오르게 하는

분홍빛 감언이설 같은 것.

 

 


 

 

황명자 시인 / 반곡지*

 

 

길의 감정이 들어와 눈물을 만들어낸다지

이른 아침 인적 없는 고갯길을 넘어보지 않으면 모를 일,

그래서 이른 아침이면 온갖 산짐승들이 늑대울음으로

우짖는 것인가,

누군가를 떠나오는 길

또 보내고 오는 길

그리고 누군가의 뒷모습이 마지막인 줄도 모르고

손 흔들고 돌아오는 길

반곡지 노목 옆에 숨어 길이 흘리는 눈물 보았다

안개라고도 하고 이슬이라고도 하는데

길이 흘리는 눈물이다

슬프단 생각이 울렁울렁 올라노는 걸 보니

눈물이 왈칵 쏟아지는 걸 보니

길이 눈물임이 자명하다

못은 이미 여러 차례

슬픔을 걷어내고 있다

뿌옇고 습기 찬 안개 같은 눈물 흩뿌리면서

* 경산시 남산면에 있는 못

 

​​-《시산맥 》(2020년 겨울호)

 

 


 

 

황명자 시인 / 녹슨 맘

 

 

방치된 못이 있다

녹물이 흙먼지에 절은 땀처럼 흘러내려

너덜너덜해진 가슴팍 같다

일 년 가까이 사는 동안

전혀 눈치채지 못 했다

우울한者는 딱 그만큼의 맘으로 사물을 대한다는데

여태껏 관심도 없던 저 녹슨 못의

존재가치에 대한 궁금증이 생겨난 탓은

갑자기 찾아온 적적함 때문일까

내 키보다 더 높이 박혀서

손이 닿을 듯 말 듯

줄을 내려 목이나 매달면 적당한 높이에서

자신의 필요성을 토로하듯 녹물 뿜어내고 있다

태어났다고 다 삶이 아니지

삶이라면 제 감당할 만큼의 무게는 주어질 텐데

저 못의生은 참으로 허망하다

세상만사 다 귀찮아진 녹슨 맘이라도 걸어 줄까

이미 다 썩어문드러진 맘은

새의 깃털만큼이나 가벼울 테니

 

 


 

황명자 시인

경북 영양에서 출생. 1989년 월간 《문학정신》으로 등단. 시집 『귀단지』 『절대고수』 『자줏빛 얼굴 한 쪽』 『아버지 내 몸 들락거리시네』 『당분간』. 산문집 『마지막 배웅』. 2014년 대구시인협회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