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려시 시인 / 핑계 외 4편
황려시 시인 / 핑계
먼지가 된 바이러스는 문장의 단백질을 먹고 산다 어젯 밤 써 놓은 A4 용지를 다 갉아먹고 똥만 싸고 갔다 너무 쉽게 너무 느리게 이어폰은 소리를 싹둑 잘라먹는다 사이키한 말을 왜 하다 말고 또 하는 거야 오늘은 뜻이 이루어 질까 몇 번을 죽다 돌아와 처음으로 다시 사는 문장들이다 모자에 집중하는 날은 바람의 어깨가 가볍지 안경은 벗어도 좋아 대충이면 되니까 젖은 빨래는 볕을 따라다니지 사선으로 부유하는 블라인드 먼지도 볕 든 곳만 따라다니지 비밀인데 하며 일기장을 보여 준 네가 오고 있다 유리 항아리에 매실 장아찌를 담아 온다고 했다 나는 국만 끓여 놓고 앉아 있다 우리 집엔 밑반찬이 없어 말하지 않는다 입을 집에 두고 온 너는 맛난 걸 주면 놓고 온 입을 찾으러 간다 밤까지 있어 줄래? 너는 있다 정말 있다 너만 알고 있으라는 네 비밀은 모두가 알게 될 것이다 모두 네가 되어 머무는 동안 소문은 제 손톱을 갉아먹는다
황려시 시인 / 신발이 수상하다
끈이 헝클어진 신발은 읽을 수 없다 내 귀는 눈에 있어 독화술로 알아듣는다 발이 부풀어도 목소리를 낮춰 봐 가지런히 묶인 신발 끈이 세탁소에 가는 길이라고 말한다 한적한 곳은 신호등을 조심해 빨간불을 보지 못하는 눈이 있거든 1302호엔 내가 보지 못한 둥근 소리들이 가까이 다가가 눈으로 입술을 더듬는다
난 심심하면 자전거를 타지 스쿠터도 타고 돌아와 휴대 전화로 문자를 보낸다 탄천에서 당신을 보았다고 마스크를 하고 있더군 어두울수록 전화기에 모인 빛은 다 내거니까 샅샅이 내 거니까 보고 읽고 전부 다 보고 읽는다 산티아고 순례길에서 질질 나를 끌고 온 신발이 허기진 말에 눈을 기울인다
황려시 시인 / 늘어나는
그러니까 맨 끝에서 밥을 먹었지 키 작은 탓에 몽돌과 같이 놀았지 묵찌빠를 하면 더 자랄까
바지에 집어 넣은 끝단추처럼 잃어버린 3센티를 찾을 수 있겠니 눈썹까지도 볼 수 있는 키높이 구두를 샀거든
더 길어진 팔로 퍼피포트 스위치를 올린다 G7 커피는 포트 안에서 터키 여자와 방언을 하고 나는 손을 뻗어 내 편 아닌 모든 밖을 더듬는다
자꾸 늘어나는 손가락과 멀어진 몽돌의 성장판이 흩어지기도 하지
나는 서서히 많아지고
수도꼭지를 틀면 직립으로 키 크는 소리 긴 복도에 돌 구르는 소리
황려시 시인 / 비누, 미끄러운 방식
척추 세 번째 마디와 네 번째 마디에 뱀을 키우는 여자는 뱀 잡는 이야기를 한다
혀가 문제야
잊을 만하면 똬리를 틀고 대가리를 쳐들고 한의사 장침 이 무효라고 독을 품는다네 사람이나 동물이나 꼬리를 감 추면 섬뜩하지 길면 더 소름이지
샤워할 때 손목의 스냅을 주의할 것 거품이 거품끼리 미끄러지는 비누를 놓쳤다 비상구에 이빨을 걸친 놈이 욕실 천장에서 키득키득 비웃고 있다
엎드려 주워 봐
뿌드득 뼈 깎는 소리로 태엽을 감는다
등허리 처마 밑에 손을 넣다가 새알 하나 주면 스르르 사라지는 뱀 두 마리가 척추 3번과 4번에 산다
황려시 시인 / 자소서
숭어는 우리 강아지 이름입니다 어미개 붕어가 낳았습니다 우리 개는 말띠입니다 백말띠 그해 첫새벽에 낳았습니다 숭어는 이력서를 읽을 수 없고
난 붕어의 경력을 모릅니다 횟집에서 숭어야, 붕어야 부르면 배시시 구름 같은 털이 내게 안깁니다
‘개가 나와야 하는데...’ 장마당에서 윷을 던지며 붕어, 숭어 외치고 히프를 탁 치면 반드시 원하는 대로 됩니다 두 마리 말을 업고 말판을 달립니다
입사원서에 자기소개서를 쓰다가 나는 숙제를 하지 않고 잡니다 숭어의 배를 목에 두르고 따뜻해서 자꾸 잡니다 손목이 두 개인 나는 양띠입니다 키는 168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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