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낙봉 시인 / 서정시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9. 16:13

이낙봉 시인 / 서정시

 

 

겨울의 북한강이 차다

얼음구멍으로

세속 다툼 담근 노인의 어깨가

바닥에 엎드린 물고기들이

해질녘의 고요가

눈부시다

 

가창오리들이 날아간다

자갈자갈자갈 자갈대는 소리

산은 깊고 불빛은 가볍고

 

얼음장 밑이 수상하다

 

불빛은 가볍고 산은 깊고

자갈대는 소리 자갈자갈자갈

날아간다 가창오리들이

 

눈부시다

해질녘의 고요가

바닥에 엎드린 물고기들이

세속 다툼 담근 노인의 어깨가

 

얼음구멍으로

겨울의 북한강이 차다

 

-시집 『폭설』(시와세계, 2011)

 

 


 

 

이낙봉 시인 / 멋대로 지나간다

 

 

 사흘째 공원은 제초작업 중이다. 드르륵 드르륵 제초기 돌아가는 소리에 맞추어 풀들은 속절없이 잘려나간다. 풀 비린내가 공원을 메운다 잘려나간 풀잎들이 마른다

 

 청소기를 돌린다. 보이지 않는 먼지는 모르겠는데 머리카락들이 순식간에 빨려 들어간다. 작년보다 머리카락이 더 많이 빠지는 것 같다.

 

 공원의 개미도 지렁이도 보이지 않는 무더위, 오늘 이발을 하려고 했는데 잠시 미루어야겠다. 그런데 까치는 다 어디로 날아갔을까?

 


 

이낙봉 시인 / 등

 

 

 내 등이 보고 싶다, 비누칠을 하면서, 비누 거품 속으로 눈물 같은 하루를 흘려보내면서, 어떤 표정으로 휴식을 취하는지, 내일도 물론 안녕할지, 한번쯤 정면에서 바라보고 싶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 몸이 가볍고 부드럽다면, 등줄기를 타고 흘러내리는 물줄기를 따라, 줄줄이 떨어져 나가는 내 오욕(五慾)의 그림자를 볼 수 있을 텐데, 내 등을 직접 보면서, 만지면서, 화해의 미소를 보낼 텐데,

 

 끊임없이 뒤를 그리워하는 나를, 딱딱한 나를 불안하게 하면서, 뿌연 거울 속의 비틀린 내 등은 기름진 뱃살을 떠받들고, 수챗구멍으로 쿨럭쿨럭 살비듬을 흘려보낸다,

 

 세상에 뒤없는 앞은 없다는데 가까이 있으면서 손닿지 않는 나의 중심.

 

-시집 <다시 하얀방> (2005년 현대시)

 

 


 

 

이낙봉 시인 / 꿈밖의 나

 

 

꿈을 꾸는지 아는데요, 꿈에서 또 꿈을 꾸는데요, 꿈의 꿈속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보여요, 그 여자를 보는 꿈의 꿈속 나를 바라보는 꿈속의 내가 또 보이는데요, 꿈의 꿈속의 꿈속 내가, 꿈의 꿈속 내가, 꿈의 내가, 꿈을 꾸는지 아는 내가, 울고 있는 여자를 동시에 느끼는 거예요, 꿈의 꿈속의 꿈속 나는 우울하고, 꿈의 꿈속 나는 불안하고, 그것을 보고 있는 꿈속 나는 초조하고, 꿈을 꾸는 것을 아는 나는 아무런 느낌이 없어요. 꿈의 꿈속에서 울고 있는 여자가 서서히 죽어간 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꿈밖의 나는 서성거리며 늙도록 꿈속 여자만 보고 있어요.

 

 


 

 

이낙봉 시인 / 좋아 좋아

 

 

너를 끈으로 묶는다. 팽팽하고 끈끈한 닭의 모가지를 비틀 듯 묶어도

죽지 않는다.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는,

 

5월의 보랏빛 꽃잔디를 보면 명자꽃이 생각난다. 뜨거운 여름밤의

달맞이꽃도 생각나고 구절초도 생각난다.

 

가끔 꿈에 보이는 뭉그러진 형체, 흐트러진 머리카락, 일그러진 입,

희미한 눈, 하체가 보이지 않는 나,

 

운악산 남근석은 남근이 아니고 코끼리바위는 코끼리가 아니다.

남근도 아니고 코끼리도 아닌 구름이 산을 넘는다,

 

 


 

 

이낙봉 시인 / 가다보면 나온다

 

 

 동틀 무렵 오르는 산은 안개로 젖어있다. 젖은 돌계단이 있고 나무계단이 있고 부서진 나무계단도 있다. 돌길이 이어지다가 흙길이 이어지기도 한다. 오르기만 하는 것도 아니고 내려갔다 다시 오르는 길도 있고 평탄하게 이어지는 길도 있다. 오르는 길옆에는 이름을 알 수 없는 풀꽃들이 흔들린다. 키 큰 나무도 있고 작은 나무도 있다. 뿌리를 드러내고 누워있는 나무도 있고 뿌리가 계단이 된 나무도 있다. 커다란 바위가 있고 그 바위에 뿌리를 내린 나무도 있다. 계곡물 소리 나뭇잎 흔들리는 소리, 새소리,

 

 하얀방에 가득한산, 산이 젖으면 나도 젖는다.

 

 


 

이낙봉 시인

1956년 춘천에서 출생. 1980년 《강원일보》 신춘문예 시부문에 당선되어 등단. 시집 『내 아랫도리를 환히 밝히는 달』 『돌 속의 바다』 『다시 하얀 방』 『미안해 서정아』 『폭설』 등. 현재 반년간지 '이상'의 발행인과 주간으로 활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