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윤석호 시인 / 새벽 도량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9. 18:01

윤석호 시인 / 새벽 도량

 

 

이른 새벽

고요 속에 울리는

청아한 목탁소리.

법당 앞 댓돌 위에

노니는 별빛에도,

새하얀 눈 소복소복

석등 위에도

청아한 목탁소리.

팔만 사천 법문과

세세인연 영혼마다

깨우침 죽비로 울리는

간절한 서원.

은하계의 무수한 별들

몇억광 년 아득히 먼데

내 가슴에 안긴 별 하나

촛농처럼 아롱아롱 젖고 있고나.

 

 


 

 

윤석호 시인 / 울음 속에는 강이 있다

 

 

울음 속에는 강이 있다

복받치는 것들이 물살을 만들고

상처를 따라 흘러내린다

 

밤새 흐느끼던 어머니

아버지는 취해 잠들었고

어린 나는 캄캄한 강물 위에서 표류했다

새벽이 되어서야 울음은 하류에 다다랐다

잔잔했고 깊었고 퍼렇게 멍들어 있었다

나는 한없이 가라앉으며 잠들었다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강물 소리를 내며 울었다

울음은 금세 하류에 닿았다

여자인 어머니를 모르는 나는

아버지의 울음소리를 흉내 낼 수 없었다

하류에 도착하고서야 아버지는

기다리던 사람이 있었다는 것을 기억해냈다

 

아버지는 자주 하류를 서성거렸다

어머니의 강,

그 복잡한 지류를 하나하나 거슬러 올라

몇 번이고 흠뻑 젖은 채 떠내려왔다

그새 강은 아버지의 강이 되었다

 

아버지는 이제 바다만 바라본다

숨죽이며 하류를 벗어난 강물은

멀리 가지도 못한 채

몸을 흔들어 물결을 만들고

손을 내밀듯 뭍으로 밀려오고 있다

 


 

윤석호 시인 / 꿈꾸는 별*

 

 

가슴속 별에 불이 붙은 줄도 모르고

거리의 불빛을 쫓아다닌다

숨 막힐 때마다 꿈은 산소호흡기

그 거리가 끝나는 저녁

마주 선 사람의 눈 속에서 새어 나오는

빛을 지켜보며 서 있다

하늘과 도시가 만나는 경계선을 따라

노을이 재즈처럼 검붉다

 

꿈을 위해 가진 것을 버린 사람의

가슴에만 별이 자란다

가슴에 담기에 별은 얼마나 날카로운지

그 아픔을 아는 별에만 불이 옮겨붙는다

사랑하지만 서로 다른 별을 품은 사람들은

밤마다 서로 다른 은하를 서성거리며

힘들어한다

그것도 사랑인 줄은 나중에 알겠지만

 

별을 꿈꾸는 도시

그 도시 위에 뜬 별들은 지금 무슨 꿈을 꾸나

어둠이 무거운 것은 젖은 꿈 때문이듯

별이 창백한 것은

그 속에 어둠을 담을 수 없어서다

어둠 없이는 빛나는 기억을

꺼내 볼 수 없어서다

 

*영화 「라라랜드」를 기억하며.

 

 


 

 

윤석호 시인 / 송어는 하류로 가고

 

 

오래된 불씨가 지병처럼 번져 숲으로 갔었네

차가운 냇물 속

점박이 꽃 검은 못이 빽빽이 박힌

송어 한 마리 건져 올렸지

재만 남은 마음속에

시린 물고기 한 마리 담고 싶었는데

싱싱한 물비린내 물씬 풍기며

물속 삶이 통째로 따라 올라왔네

사랑인 줄만 알았는데 전부일 줄은 정말 몰랐네

호기심 같은 입질 한 번에

생이 다 걸려들 줄은 그도 몰랐을 거야

그녀를 보내듯 물속으로 다시 돌려보냈네

 

오늘은 송어를 돌려보낸

시내를 따라 상류로 갔었네

오르막이라 힘들긴 해도

소년처럼 가슴 두근거리며 거슬러 올라갔지

크고 굵은 놈들이야

다들 깊고 푸른 하류로 갔겠지만

맑고 얕은 물에서 재잘거리는

풋내기들을 보고 싶었지

그 물가에서 그때처럼 자리를 펴고

송어보다 더 재잘거리는

그 입술에 입 맞추고 싶었네

송어처럼 파닥거리며 입 맞추고 싶었네

그러다 문득 잠을 깼네

송어는 물길 따라 하류로 가고*

나는 늙어 있었네

 

*예이츠(WB.Yeats)의 방황하는 잉거스의 노래」에서

 

-시집 <4인칭에 관하여>에서

 

 


 

 

윤석호 시인 / 철 대문

 

 

변두리 골목 안으로 이사를 갔다

러닝셔츠 바람의 아버지가 어깨를

벌겋게 태우며 대문을 닫았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철 대문은 퍼덕거렸고

망치로 얻어맞을 때마다 카랑카랑 소리를 질렀다

대문은 완강했고 나는 어렸다

 

대문 안쪽에 시간이 쌓여 갔다

마당에서 대추나무 가지가 꾸불꾸불 자랐고

철 대문에 대춧빛 꽃이 만발했다

붉게 녹물을 토해내던 장마철 지나

아버지는 꽃을 벗겨내고

페인트로 눈물자국을 지웠지만

시간은 조금씩 새 나가고 있었다

대문은 중년처럼 무거워 보였고

나는 고개를 숙인 채 들락거렸다

 

철대문꽃핀 자리마다 버짐이 생겼다

버짐이 두툼하게 속에서 차오르는 동안

아버지는 몇 번 덧칠을 했지만

대문은 아랑곳하지 않고 늙어갔다

대추나무 엉클어진 머리 사이로 바람이 불었고

동생이 시집을 갔고 어머니가 세상을 버렸다

아버지가 욱여넣었던 시간이 모두 빠져나갔다

나도 이민을 갔다

 

아버지는 대문을 나와 아파트로 이사했다

애들 데리고 아파트에 살아보는 게

꿈이었던 어머니가 아버지를 따라와

식탁 위에서 웃고 있다

어머니 뒤로 덧칠이 벗겨진 철 대문이 보이고

사진 찍던 내 그림자가 어머니 품에 안겨 있다

밥을 먹는 아버지 얼굴이 철 대문 같다

눈시울이 대춧빛으로 붉다

 

-시집 『4인칭에 관하여』 (시산맥사, 2020)

 

 


 

 

윤석호 시인 / 떨고 있을 때

 

 

 사직을 권고받고 그는 의자에 앉아 다리를 떨었다 한기가 들면 속에 것 아무거나 불을 붙이고 아무 데서나 떨림을 피워 올렸다 술자리에서도 그는 떨었다 테이블이 떨렸고 술잔이 떨렸고 합석한 사람들도 함께 떨었다 ‘더 태울 게 없어 한동안 동면해야 할 것 같아’ 그가 달그락거리며 귀가한다

 

 더는 음을 조절할 수 없어요 조율사가 영수증을 내밀었다 영수증과 함께 백 년도 넘은 피아노를 토막 내 쓰레기통에 버린다 내부는 음표 대신 쉼표가 가득하다 손가락질당한 건반과 밟힌 페달은 어쩔 수 없지만 속은 아직 희고 탱탱하다 강철 프레임이 백 년의 떨림에 시달리며 포자를 피워 올리고 있다

 

 전화기 속 음성이 떨린다 목소리가 뒤집어지며 가성의 영역을 들락거린다 ‘전주만 들어도 가슴 뛰는 노래가 있잖아요 어떻하겠어요 그동안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는데’

 

 유리그릇에 랩을 씌우고 팽팽하게 잡아당긴다 금방 북이 된다 팽팽하면 음이 높아지고 유쾌해진다 엄마는 요즘 유쾌하다 랩이 느슨해진 그릇 속 과일은 쉽게 녹이 슨다 나는 녹슬었다 엄마의 새 애인은 꼭 사위 같다 나는 떨며 장인이 된다

 

 


 

윤석호 시인

1964년 부산 출생. 부산대 기계공학과 졸업. 2011년 미주 《중앙 신인 문학상》 당선. 2014년 《부산일보》 신춘문예 당선. 시집 『4인칭에 관하여』. 현재 한국문협 워싱턴주 지부 회원, 시마을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