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희업 시인 / 선택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10. 15:19

김희업 시인 / 선택

 

 

사과가 내 입에 들어오기까지

오로지 한 개의 사과만을 선택해야 했다

그건 결코 쉽지 않은 확률

태풍이 사과의 목을 위협할 때 동요하지 않아야 가능한 일

낯선 이의 눈독에

사과의 잠 못 드는 나날이 시작되었다

한 그루 사과나무가 심어지고부터 인간의 죄는 생겨난 것

 

처음 대하는 과일을 보고 설레는 건

벌레처럼 야금야금

아직 과일의 세계에 닿지 못했다는 증거

 

붉은 옷가지 벗겨지는데

왜 내 얼굴이 붉어지는지

하고많은 사과 중에서

하필 너의 성숙을 맛보아야 했으니,

선택된다는 것은 불행한 것

계절은 어김없이 돌아와 한동안 제자리를 지키듯이

봄에서 먼 겨울로 거처를 옮겨 온 사과의 여로(旅路)

미각은 언젠가 어두워질 것이다

어제와 내일의 사과가 다른 것처럼

내일은 내일의 사과가 필요하다

내일은 선택하지 않아도 내일이면 온다

 

-『김포신문/김부회의 시가 있는 아침』 2022.11.04.

 

 


 

 

김희업 시인 / 모서리의 사랑

 

 

빌딩 모서리로 햇빛 모여 반들거리는 아침

 

먼지의 일가가 정착을 이룬, 소란스런 한낮의 모서리

 

오후의 물고기가 수족관 모서리를 반복해 두드리는 까닭,

그곳이 화엄이 아니기 때문

 

절박한 사람이 신통한 점쟁이에게 발 들여놓듯,

모서리에 선 위험한 그림자

뛰어내리기 직전

아니다, 싶을 때

돌아서게 하는 모서리의 사랑

 

그리하여

그리하여

모서리는 중심

 

초침이 분침을 쫓고

시침이 분침에 쫓길 때

밤의 모서리를 돌아서는 달,

달의 근육이 구부러졌다 펴지기도 해

 

침대 모서리에 걸터앉은 잠

깊고

깊은

평화

 


 

김희업 시인 / 구름사내

 

 

검은 옷 갈아입고 서둘러 외출을 했지

흐릿한 안개 어깨에 걸치고

슬픔이 빛날 때를 기다려

그대의 뺨에 감당할 수 없는 눈물만 주었지

불어터진 비를 보아버린 지상의 그대여

나의 입은 가물어 미안하구나

울음주머니를 잃어버린 나는

그대와 더불어 속울음 울었지

 

하늘도시를 유령처럼 떠도는

나는 구름사내

대지로부터 흔한 찬사 한 번 받지 못한

어느 이국에서 온 짐승처럼

하늘길 밟고

낯선 우주로 흘러들지

 

어젯밤은 별똥별이 자신의 부고장을 전해 주었지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

겉봉이 유난히 반짝거려

빛나던 한때를 떠올렸지

 

나를 이탈한 자

불편한 세계를 나온 듯

앞서가지만

후진할 수 없는 죽음 앞에선

다소 헝클어진 모습이었지

 

 


 

 

김희업 시인 / 진화하는 당신

 

 

본얼굴을 지워버리고

그 위에 타인을 그려보는 당신

익숙한 자신의 얼굴을 잊어버릴 때까지 고치고 고쳐간다

자신이 자신을 알아보면 완벽한 실패라며,

마치 생을 멈추기 전에는 멈추지 않을 듯

아직 개발 중인 당신의 얼굴

사이좋게 나눠 가졌는지, 코가 닮은 여인들이 거리에 즐비하다

천편일률적인 몰개성의 시대가 왔다

칼날 앞에 죄 없이 바르르 떨던 눈썹,

네게 무슨 죄가 있으랴

불에 석유를 붓듯, 손쉽게 타오른 결정이

원래대로 되돌릴 수 없게 만든 것을

자신이 자신조차 몰라본다면, 당신은 새로운 종種

낯선 얼굴로 진화하려는 당신

하지만 굳이 달라질 필요는 없다

당신은 당신이니까

아직 손볼 데가 남아있다고 불만을 터트리는 당신

그곳은, 불행히도 유독 자신의 눈에만 띄는 법

지금껏 그래 왔듯, 애써 잘못 그리지는 말고

당신답게 그려라

당신은 당신이어야 하니까

 

 


 

 

김희업 시인 / 함정​

 

​오래 묵은 눈이라도 좋았다

눈이 쌓아놓은 허방에 빠져든다

서슴없이 동굴로 빨려드는 박쥐처럼

당신들은 함정에 익숙하다

이것은 함정을 넘어서려는 믿음이다

눈이 내려앉아

땅의 높이가 산더미 같다

같은 시간

눈을 받아먹는 바다의 식성

바다의 두께는 변함이 없다

이것은 바다의 사실이다

박쥐에게 동굴은 안온한가

어제 채굴하던 빛을 작업하러

열쇠 없이 어둠을 열고 들어간 박쥐는

어둠에 매몰된다

속이려는 구덩이를 눈치채고

누군가는 조심스레 말하지

구덩이에 속지 말라고,

속고 있는 구덩이가 있을 뿐이라고

눈은 한눈을 판다

주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눈은 자주 실패를 경험한다

지구의 근친으로 지내면서

그간 파놓은 둥근 구덩이가 깊어가는 줄

모르고

하염없이 눈을 바라보는 사이

눈과 눈의 경계가 녹아내리고 있었다

함정이었다

 

 


 

 

김희업 시인 / 에스컬레이터의 기법

 

 

30도의 기울기란

마음이 먼저 쏟아지지 않는 경사

알 수 없는 자력이 몸을 곧추세운다

그냥 밟고만 있어도

높이가 커진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굳이 거슬러 내려가지 않고

계단의 물결에 발을 맡길 것이다

거슬러 오르는 멋진 오류는 연어의 일

한계단씩 베어 먹은 사람들의 높은 입

그들은 먹이를 얻기 위해 날마다 입을 벌린다

외마디 비명도 없이 공중에 떠 있는 현기증

어떤 뒷모습이라 할지라도 바라보면 쓸쓸하고

꼭 그만큼만 보여주는 생의 짧은 치마

넘치지 않는 저울질로 평등하게 내려놓고

빈 계단만 층층이 접히는 지평선

맞물린 관계 속에

서로 먹고 먹히는 다정한 세계

기울어진 생계를 떠안고

마음이 쓰러지지 않게

흙이 묻지 않는 보법으로 반복되는 생성 소멸

오늘밤

달은 발자국 남기지 않고 가던 길을 갈 것이다

 

 


 

김희업 시인

1961년 서울에서 출생. 건국대 국어국문학과와 서울예대 문예창작과 졸업. 1998년 《현대문학》으로 등단. 시집 『칼 회고전』 『비의 목록』. 천상병시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