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순해 시인 / 순례 외 5편
권순해 시인 / 순례
너와 나의 가난한 저녁을 어제와 오늘 다르게 읽는다
기억은 언제나 길을 따라가며 재구성되지
우리가 도무지 생각나지 않을 때는 저문 들녘 혼자 흔들리는 구절초처럼 쪼그리고 앉아 그냥 모르는 사람으로 걸어가자
언제나 좁고 어두운 통로에서 먼 별을 바라보는 것은
오늘을 내일처럼 내일을 오늘처럼 기다리며 그리고 끝내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여도 한없이 걸어가라는 것이지
권순해 시인 / 배추흰나비 애벌레
날개를 빗는다
언젠가 올 그날을 기다리며 배춧잎을 갉아 먹는다
작은 발톱으로 순간순간을 지나가면 시들해지는 허공의 이파리들
뿌리가 욱신거릴수록 점점 날개로 가까워지고
금이 간 관절로도 부서지지 않는 희망을 쌓아올린 수많은 어머니처럼
한 생이 다른 한 생에게 몸을 내어주고 있다
하지만 나는 욱신거리는 저 뿌리의 힘으로 공중을 날아오른다는 것을 까맣게 잊고 있다
권순해 시인 / 두물머리
서로 다른 곳을 흘러온 물과 물로 만난다
바람 불 때마다 흩어졌던 머리카락들이 이내 제자리로 돌아오듯
오래된 느티나무 아래서 가을을 받아적던 여자와 손가락 하트의 남자가 사진을 찍는다
멈춘 듯 흐르는 물 한 자락 길게 물고 날아가는 새를 보면서 마음이 자꾸 축축해진다
안부조차 물을 수 없는 옛 이름들과 물처럼 다시 만나 아무 데나 흘러가고 싶다는
이런 글썽글썽한 생각들이 등 뒤에서 흐르고 있다
권순해 시인 / 안경에 대한 짧은 추측 낡은 의자 위에 한쪽이 부러진 안경이 누워 있다 수가성 두부집과 마릴린 호프집 몽블랑 빵집을 지나 블루빈 커피집을 거쳤을 비틀거리는 걸음이 누워 있다 집을 잃어버렸거나 누군가에게 버려졌다는 신고마저 없는 채로 밤새 고여 있던 수소문이 훅 끼쳐 온다 그의 몸에 고스란히 찍혀 있는 어두운 이력들 어린 고양이가 살갑게 핥는다 아직 이슬이 맺혀 있는 간밤의 흔적을 지운다 눈에 밟히는 것들이 많아 유서조차 쓰지 못하는 변방의 안경들이여 의자 없이도 부디 안녕하기를 고양이의 따뜻한 혀를 생각하면서 -월간 『우리詩』 (2020년 12월호)
권순해 시인 / 못자국
어느 성인의 못자국을 당신 손에서 봅니다
한 번도 들춰 보지 않았던 상처가 애벌레처럼 꿈틀거립니다
무거운 공중을 들어 올리느라 계절의 끝에서 반쯤 무너져 내리던 나무처럼
너덜너덜해진 통증을 주삿바늘에 기댄 채 그 손 더 높이 들어 올립니다
폐그물처럼 낡은 당신의 손금 위에 가만히 눈빛 하나를 포갭니다
이제야 알 것 같습니다 공중이 추락하지 않는 것은 맑고 깊은 못자국 때문이라는 걸
박힌 자리에서 빼낼 수 없는 저 단단한 자국들 때문이라는 걸
-시집 『가만히 먼저 젖는 오후』에서
권순해 시인 / 심야버스
그들은 모두 한밤에 할증되어 온다 헝클어진 머리카락으로 승차해 잘못 끼운 단추로 온다 점멸 등을 지나 거침없이 깜박이며 온다 여름 소낙비처럼 느닷없이 쏟아지기도 한다 차창으로 얼핏얼핏 스치는 문닫은 순대국밥 집을 지나 보세 옷집을 지나 응급의료센터를 응급으로 지나 가난한 등대의 희미한 불빛으로 온다 손가락에 낀 반지처럼 영롱하게 오는가 하면 이슬 맺힌 풀잎으로 오기도 한다 아직 따뜻한 체온이 배어 있는 그들은 모두 허기로 온다
그들은 모두 심야에 심야로 온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