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aisy Kim 시인 / 레몬머랭파이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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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isy Kim 시인 / 레몬머랭파이
혼자 넘쳐버린 감정이 성긴 가루로 풀풀 날리다가 뭉쳐집니다 단맛 쓴맛 신맛 시행착오로 반죽된 커스터드 위 거품입니다
옆집에 혼자 사는 낸시 할머니는 외로움이 산처럼 쌓였어요 북쪽을 기다리고 기다림을 들킬까 두려워 머랭 속에 자신을 가두었어요 구부린 등에 주렁주렁 매달린 고독이 자꾸 뚱뚱해져서 시간이 정지했어요 아무도 돌아보지 않았어요 그녀의 레몬색 레인코트가 여름의 깊이를 알려주었어요 한 조각의 영혼이 한 사람의 그녀가 사라졌어요 영혼을 버리려 녹아버린 눈사람처럼
처음 만났던 그녀와 마지막 만났던 그녀 웃음과 울음은 내용이 없어요 그 사이에서 레몬필링이 끈적거리고 있어요
겨울과 레몬과 머랭은 가깝고도 멀어요 타인의 외로움을 감싸며 구워지는 부드럽고 상큼한 인생이고 싶어요
부스러기처럼 선명한 기억이 오븐의 바깥 바닐라 향으로 흩어집니다
Daisy Kim 시인 / 아보카도를 받아쓰다
아침이 행간마다 둥글어진다
낯선 식물은 젖은 맨발의 모국어로 말문이 트였다
제목을 짓지 못한 과육을 파내어 열대의 시간을 입에 물면 그늘은 초록에서 갈색으로 자세를 바꾼다
우리에겐 우기의 기록이 없어 목이 마른 첫 문장 쪽으로 곡선을 끌어안고 여무는 껍질
바람 냄새와 햇빛의 휘파람이 눈 마주칠 때 꽃망울이 맺히던 여름의 속도 덜 익은 말로 노란 꽃말에 닿는다
소용돌이치는 달의 바다로 밀도가 촘촘해진 모래사장으로 폭풍의 무늬가 스며든다
금이 간 달에서 옛날이 쏟아져 내리는 밤을 반으로 자르면 크고 단단한 후생이 들어 있다
그믐의 문을 열고 시작된 연두의 호흡, 거기서부터 당신과 내가 자란다
Daisy Kim 시인 / 마트료시카
엄마는 가장 완벽한 뱃속에 나를 입주시켰어요
엄마와 언니 동생은 나와 시간의 무늬를 똑같이 나누었어요
손톱처럼 시간이 자라나 엄마를 열고 뛰어나가요
막 태어난 생일과 결별을 해요 어제는 지워지고 내일은 어디엔가 갇힐지 몰라요
같은 무늬만 남았을 때 다른 삶을 가질 수 있나요
엄마의 체온이 과거의 옷을 벗고 현재의 시간을 박음질해요 나는 왜 자꾸만 작아지는 미래가 되는 걸까요
시간을 살려주세요
Daisy Kim 시인 / 슈가케인 보고서, 백 년을 쓰다
국경을 넘은 한랭전선이 편적운을 몰고 태평양을 건너온다
두고 온 족보가 꽃파도로 일렁이는 호놀룰루항, 어금니를 꼭 깨문 하늘은 생의 물살 위로 설탕가루 같은 유성우를 뿌려준다
타국의 낱말이 벤 쓴 커피를 여물지 않은 초록 막대로 저어야만 했던 할아버지와 아버지들, 막대의 연골이 녹아내렸다
이민을 연 사탕수수 한 껍질을 벗겨내면 시야 가득 상실과 고립이 발아된 청춘의 늪지와 나라의 독립이 설탕이 되어 꾸덕꾸덕 말라 붙어있다
눈물마저 태워버리던 열대우림 속 모국어로 뱉어낸 마른 숨이 잘라낸 밑동마다 끈적끈적 맺히고 먼 곳을 맨발로 건너온 노동이 떫었던 사탕수수의 숨통으로 하루하루를 동그랗게 거두어들였다
할아버지와 아버지들의 흰 계절은 젖은 흙 속 사탕수수와 함께였다
긴 막대마다 풀 비린내의 활자들을 익숙한 화법으로 뱉어내고, 나는 씹을수록 단맛을 우려내던 그 끝없는 노동의 하얀 결정체를 받아 적는다
해안선의 즐비한 녹색 막대를 따라가다 보면 갤릭호*가 들어오던 바닷길로 연결되고 설탕으로 밀봉된 독립자금을 나르던 물너울은 사탕수수의 뿌리에 닿아 하나로 이어지려는 내 핏줄이다
그 설탕 길로 햇귀 같은 봄이 다시 들어오고 있다
* 최초의 하와이 한인 이민선
Daisy Kim 시인 / 사막장미
꽃은 모래를 키운다
몸통을 관통하는 흙살이 화관을 키워내고 모래의 뿌리는 통각의 둥근 호흡을 한다
삶의 자장을 찾아서 하루하루 짜낸 시간은 죽음의 섭취 열량이 되고 몸에 달라붙는 무질서한 검은 바람이 모래의 내재율인 것처럼
완벽한 채도로 쏟아진 태양이 키워낸 분홍 몇 장의 꽃잎들, 분홍 속성의 플롯으로 모래알들의 무한 비문을 쓴다
모래의 무릎이 너무 깊어서 사막에는 활자의 발이 쉽게 걸어오지 못한다 이마를 쪼던 붉은 태양이 발등에 떨어지면 모으던 꽃물로 시의 혀를 적시고 갈증의 단위를 꽃잎이 주는 문장의 구근이라 정의 한다
꽃은 모래의 지혜를 움켜쥐었지만 신성한 사막의 생각을 쓰지 못하고 흘러내리는 의심이 분홍 반죽을 뭉치는 동안에도 꽃물 든 묽은 시간의 켜는 세상의 녹슨 별빛을 닦지 못한다
목이 길어진 여름을 지나면서 한 그루의 뼈와 살을 심었다 가장 고통스러운 곳을 생각하고 또 생각하다가 벌거벗은 넝쿨을 열고 캐내어 가는 당신의 이름은,
Daisy Kim 시인 / 모자 이야기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하면서부터 모자를 썼지
체온을 바꿔 써도 거짓말처럼 사라지는 머리카락 이마를 감추면 속여야 할 것이 많아진 마음이 있었지
모자에 갇혀서 먹에 끼인 뒷골목의 구름을 읽던 그때
티브이에서는 방배동 모자의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지 바라보면 추워서 어느새 나는 모자를 깊숙이 눌러쓰고 있었지
서로 등을 돌려 닿지 않는 곳 깊은 겨울의 간격
크리스마스의 약속이 깨어질까 두려워 모자 속에서 새를 꺼내어 눈송이처럼 날려 보냈지
접어두었던 날개가 눈을 입고 어깨를 향해 쏟아질 때 겨울은 얼어붙었지
신의 발끝에 촛불을 심어둔 밤 교회 십자가 아래에서 햇살의 손을 놓아 버린 단칸방에서 이건 평등하지 않은 이야기
누가 죽었는지 아무도 모르게 겨울이 뭉쳐지고 있었지
당겨진 눈시울을 감추고 오래 숨기 위해 모자를 눌러썼지
챙이 넓어진 나의 뒤통수를 의심하는 다른 모자들이 내 뒤에는 늘 있지
내일은 도저히 믿지 못할 것이라서 나를 믿지 못하는 나를, 모자에 깊이 감춰두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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