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최지온 시인 / 폐타이어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18. 16:42

최지온 시인 / 폐타이어

 

 

이미 먼 곳에서 뛰어 온 것 같다

그러면서 또 먼 곳으로 돈다

 

아이들이 가쁘게 숨을 쉰다

 

내가 앉은 의자는 삐걱거리고

땅을 짚고 다시 일어설 때 숨을 고르는 것처럼

 

아이들이 욕설을 한다 아이들은 들떠 있다

 

홀로 떨어져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움직이는 사람과

움직이지 않는 사람

 

운동장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만이 있다

 

서로를 묶어놓은 듯 욕설들이 길어진다 버릴 것을 버리기 위한 숨소리 같다

 

폐타이어 하나로 세 개의 신발 밑창을 만들 수 있대

누군가의 말이 떠오르고

 

어딘지 모르게 운동장이 들뜨는 것 같아서

무릎을 접고 의자에 앉는다 기울어진 의자가 더 기울어진다

 

아이들이 눈앞에서 기차놀이를 한다

느리게 굴러가는 기차를 또 다른 아이들이 밀고 간다

 

손끝만 스쳐도 잘 굴러간다

 

기차 안에는 의자가 있고 내가 있고 아이들이 있다

 

-〈경북방송/김조민이 만난 오늘의 시〉2023.03.14.

 

 


 

 

최지온 시인 / 지금 가는 길이야

 

​​

 당신의 전화는 거기에서 끊겼다

 

 핸드폰은 24시간 동안 깨어 있었고

 지구는 수시로 배터리가 닳았다

 

 서쪽에서는 폭염이 사람들을 쓰러뜨리고

 동쪽에서는 폭우가 집을 무너뜨린다고 했다

 배를 움켜쥐고

 아아악 소리를 지르면서

 

 데굴데굴 굴러가는 중이라고 했다 닳는 돌멩이인가 하면 터지는 수박이고 바람 든 공인가 하면 깨지는 컵이라고 했다 갈라지고 쓰러지는 오래된 벽이었고 한꺼번에 주저앉는 천장 같다고 했다 굴러갈 때에는 어떻게 굴러가는지

 

 딱히 구체적인 것 같지 않았다

 당신은 여름이고

 당신의 여름은 거기에 있고

 

 여름이 알고 있는 단 하나는 여름을 모른다는 것

 

 배터리를 갈아 꼈을 때처럼

 아니 배터리가 되어 들어갔을 때처럼

 

 주저앉지 않고 깨지지 않으면서

 터지지 않고 쓰러지지 않으면서

 

 내가 알고 있는 건 당신도 이미 알았을 것이다

 

 나의 여름은 이곳에 있고

 

 핸드폰을 꽉 쥔 채로

 놓칠 까봐

 떨어뜨릴 까봐

 

 계속해서 전화를 걸면 뚜뚜뚜뚜.........

-계간 『아토포스』 2024년 겨울호 발표

 


 

최지온 시인 / 기분의 기분

 

 

기분은 증발되지 않는다

 

누군가 휘저으면

휘젓는 대로

풀어지는 물감 속에서

 

기분은 밀어낼수록 말이 없어진다

 

손은 공중에 올라가 있고 할 말이 있다는 듯

몇 바퀴 돌다가

불끈 쥔 주먹을 풀면

 

놓아 준 물고기처럼 달아나야 할 텐데

기분은 슬며시 부족해지고

 

혼자여서

죽을힘을 다해 혼자라서

 

물고기는 물에 부딪치며 사라지고

섣불리 드러내지 않는 기분은 번번이 살아남아

 

깨뜨리는 상상을 한다

세상의 모든 마지막을 끌어 모으듯

들킬 때까지 꿋꿋하게 깨지고

 

물을 닮아가다가

물이 된다

그것은 나를 던지는 것과 같고

 

아무리 던져 버려도

 

물색에 잠시 숨어 있을 뿐이다

 

2023년 모던포엠 5월호 발표

 

 


 

 

최지온 시인 / 매시업

 

우리 잠깐 볼 수 있어요?

나는 나갑니다

우리는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하루 중 가장 한가한 시간이었고

가장 바쁜 시간이었다 해도 나갔을 겁니다

오늘처럼 비오는 날

우산 없이 걷는 사람이 있습니다

충분히 젖은 채로도 젖지 않은 것처럼

어깨를 들썩이며

그는 음악을 듣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렇게 생각한 건

내 귀에 이어폰이 꽂혀 있기 때문입니다

장르도 모르는 음악 때문입니다

눈을 커다랗게 뜨고 빤히 쳐다보기 때문입니다

우산을 쓴 나와

비를 맞고 있는 그가

같은 얼굴로 서성거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한 번 보았을 뿐이지만

우리는 매일 같은 시간에 이곳을 지나고 있었고

같은 상품을 진열해 놓은 편의점 앞에서

컵라면을 먹은 적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는 어려운 사람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내가 아는 사람은 늘 어렵고

모르는 사람 앞에서는 솔직해질 수 있습니다

가끔씩 우리는

지평선을 궁금해 할 수도 있고

비처럼 흘러 아픈 데를 씻겨줄 수 있습니다

이렇게 계속 그를 바라보지 않아도

기다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기다리지 않아도

비는 곧 그칠 것입니다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21년 봄호

 

 


 

 

최지온 시인 / 하루 양식장

 

 

하루는 그리고를 반복하는 물고기다

 

누군가 한 움큼 먹이를 쥐었다가 던진다

종소리처럼 달려드는

물고기들

 

미역처럼 흔들려도 폐사하지 않으니

어쩌면 세상의 모든 그리고를 품고 키우는지 모른다

 

그리고를 풀어놓을 때마다 비린내가 몰려와

 

한꺼번에 달려들면

함께 뒹굴며 목을 딸 수도 있을 것 같은데

 

여전히 버섯처럼 순한 물고기들

목맨 눈동자와 번득이는 비늘이 물속에 풀어져 있어

 

하루는 물을 안고 그리고와 그리고 사이를 헤엄친다

 

그리고라는 말 속에는 손을 잡는 느낌이 있다

잡힌 적 없지만 잡혀 있는 것 같고

 

미리 손을 내밀면 미끌거리며 빠져나가고

 

아직도 팔딱거리며 자라는 지느러미

그 아래에서 새끼들이 알알이 태어난다

 

밥을 먹어도

늘 허기가 져서

 

그리고 또 생각하는 동안

 

문 닫을 시간이 되었다 날 선 가시처럼 뒤돌아 볼 때에도

 

맥락 없이 떠다니는 물고기들

서로의 등을 붙이고 혼자서 숨을 참는다

 

-시집 『양은 매일 시작한다』에서

 

 


 

 

최지온 시인 / 후에

 

 빈 페트병을 모으면 새가 되었다. 이를테면 새는 꽉 문 어금니이거나 힘을 준 뒤꿈치이거나, 어디든 피어나는 나팔꽃이거나 쑥부쟁이, 무섭게 자라다가 폐허를 숨겨 놓은 여름이었고, 여름에게 인사도 없이 떠나는 비이거나, 다시 돌아올 거라고 큰소리치는 폭우였다.

 

 날갯짓은 멈출 수 없으므로

 

 오른 발 왼 발 오른 발 왼 발

 숫자를 세듯이

 

 날아간다는 것은

 

 다트판의 느와르

 공공연한 새장 속으로

 

 이런 클리셰

 

 옵션 1 옵션 2 옵션 3 옵션 4

 

 새 한 마리였고, 새들의 무리였고, 무리들의 무리수이기도 했다. 무리수는 돌아갈 곳이 없는 오늘이었으며, 돌아갈 곳을 잊어버린 발톱이었으며, 돌아가지 않아도 좋고, 돌아갈 곳을 놓쳐도 괜찮은 담쟁이들의 대화 같은 것.

 

 러브버그 알아?

 

 해충도 아니고 익충도 될 수 없대

 아무리 잡아보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 사이에

 

 쪼그려 앉아

 찌그러뜨리기 비틀기

 

 죽었나 살았나

 아무리 흔들어 봐도

-웹진 『시인광장』 2024년 10월호 발표​​​​​​​​​​

 


 

최지온 시인

경기도 화성 출생. 2019년 《시로여는세상》으로 등단. 시집 『양은 매일 시작한다』. 2022년 아르코 발표지원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