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전순영 시인 / 부활·4 외 8편

파스칼바이런 2025. 7. 24. 13:23

전순영 시인 / 부활·4

 

 

산이 일어서고 있다

온몸으로 맞이하는 수만 마리 나비 떼

햇빛하고 놀던 눈이 큰 귀가 큰 입이 큰 나무

그들에겐 어깨만 살짝 스치고 지나 간 눈발이

북쪽 그늘 아래 햇빛 한번 만나지 못한

빼빼마른 북풍에 이 뺨 저 뺨 얻어맞고 울던

헛개나무에게로 가서 벚꽃으로 함북 피었다

그 아래 땅만 내려다보고 있던

진달래 가녀린 가지마다 옥매화 흐드러지게 피고

그 아래 싸리비나무는 한여름 광화문 네 거리에 쏟아지던

분수처럼 맑은 수정 구슬 뿜어내고

 

또 그 아래 보래기는 얼굴 한 번 들지 못하는 내시같이

축 처진 어깨가 펄펄 군자란으로 솟아오르고 있다

비탈길에 서서 뭇 손길에 머리채 쥐어뜯긴

무지렁이 따박 솔도 한 걸음 한 걸음 내려서면

꽃이 될까

 

 


 

 

전순영 시인 / 티끌의 눈

 

 윙윙거리며 날개를 벌리고 달려들어 침으로 찌르고 뱅글뱅글 돌면서 부랑아 우두머리 인양 약한 놈들의 먹이를 빼앗고 되려 큰 소리 치곤 했다 당하기만 하던 약한 놈들이 힘을 합해 덤벼들어 큰 싸움이 벌어졌다

 

 분쟁이 나면 여왕벌이 나와 양쪽을 다독이며 해결했는데, 이번만은 아니었다 뼈가 부러지고 무리 틈에 깔려 죽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안 했다 지난날 동료들에게 돌아갈 먹이를 훔쳐 묻어두고 시치미를 뚝 떼곤 했던 일들이 화근이었다

 

 그걸 알면서도 워낙 주먹이 센 놈이라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속으로만 끙끙 앓고 있었다 그렇게 곪은 채 지구는 돌아가고 곪았던 환부에서 고름이 흘러나와 고름은 고름을 낳고 고름은 전염병이 되어 여기저기서 동료들이 픽픽 쓰러져도 나 몰라라 저만 먹고 마시고 배를 남산만하게 내밀고 큰소리쳤다

 

 새 여왕을 뽑았는데, 늘 구석에 몰려있던 어리숭한 놈이 여왕으로 뽑히었다 당연히 힘세고 동료들을 손에 쥐고 흔들던 그놈이 될 줄 알았는데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심통이 난 탐욕 자는 먹지도 자지도 않고 아무 일도 안 하고 기가 죽어 죽어 죽어 있었다

 

 얼마후 이웃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졌다 여기서 역시 약한 동료들에게 행패를 부리고 먹이를 빼앗고 침을 쏘는 놈이 있었는데 그놈이 여왕에 뽑힌 것이다 이 또한 알 수 없는 일이었다

 

 일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놀기만 하고 일을 안 했다. 먹이도 물어오지 않고 물도 길러오지 않고 한참 성장기에 접어든 어린 벌들도 돌보지 않고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여왕벌이 알을 낳으려면 그 자리를 포근하게 만들어 줄 건초가 있어야 하는데 아무도 그 일을 해주지 않았다

 

 목이 마르고 배가 고프고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그는 여왕의 자리를 버리고 떠났다 그러자 일벌들이 너나 할 것 없이 죄 일터로 나가고 어린 새끼들을 돌보고 먹이를 물어오고 물을 길어 오고 저마다 바쁘게 자기 몫을 착착 해내고 있었다

 

 마침표. 만 한 그들 뇌 속에 어찌 그리도 맑고 밝은 눈을 담고 있었을까?

-웹진 『시인광장』 2025년 5월호 발표

 


 

전순영 시인 / 달을 따러 가다

 검붉은 바위와 석탄이 박힌 얼룩무늬 능선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온통 까만 바다 달을 따오면 몇 조각으로 나눌까 곱셈과 뺄셈을 하다 보면 해가 저물고 눈을 뜨면 다시 곱셈과 뺄셈을 하면서 아니 그달을 몽글게 갈아서 이 까만 세상에 흩뿌려야지, 가슴에다 못을 박고 오르기 시작했다

 

 겨울을 지고 가다가 여름을 지고 가다가 발바닥이 조금씩 닳더니 졸아들더니 뼈가 드러나더니 바위와 맡 닫는 소리 따다닥 따다닥 딱 딱 그렇게 소리 소리가 걸어서 공룡 꼭대기에 올라보니 달은 독수리가 오도독 깨무는 소리...

 

 다시 나를 오른다 바람에 날아가고 햇볕에 닳아지면서 명주실 숨 구기면서 엎어지면서 겨우 꼭대기에 올라보니 달은 독수리가 따 담고 저 산 너머로 가버린 빈 하늘 몽글게 더 몽글게 나를 갈아서 길에다 뿌리며 다시 오른다 앞뒤로 눈이 나오더니 온몸이 귀가 되어 걸어도 그 자리 발을 디디면 허방 다시 발을 디디면 또 허방

 

 목을 허공에다 매달아 놓고 까만 밤이 더욱 까매질수록 속도를 낸다 풀도 나무도 깨어서 가지마다 파란 수혈 받아 올라가니 달은 독수리가 꿀꺽 삼켜버린 까만 껍질만 수북이

 

웹진 『시인광장』 2023년 7월호 발표

 

 


 

 

전순영 시인 / 분재

 

 

 어둠속에서 하늘만 쳐다보다가 그냥 절벽으로 떨어져버릴까 하다가 산을 올라갔다 꽃들은 저마다 피는 때가 따로 있었고 색깔도 향기도 달랐다 크고 작은 나무들이 어울려 숲을 이루고 있었다 발밑에 풀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고 있었다

 

 한포기 풀이 되어 비탈을 오르기로 했다 하루를 연명하기 위해 아기를 등에 업고 오늘을 추켜들고 이 거리 저 거리 헤매고 돌아다니며...

 

 손에 닿는 칡넝쿨 붙들고 오르면 주르르 미끄러지고 다시 오르면 넘어지고 또 넘어지면서 깨진 무릎 앞에 끊어져버린 오늘, 마음도 끊어졌다 억새를 붙들고 오르면 베인 손에 떨어지는 눈물도 베어지고 쓰린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이 더는 미끄러지지 않은 버팀목이 되어 주었다.

 

 겨울이면 방안이 돌이 되는 밤 아기를 품에 안고 뜬눈으로 새벽을 기다리던 양 손엔 어제와 오늘을 들고 오르내리던 깔딱 고개, 앞으로 뒤로 휘는 몸 노끈 같은 삼거리 길에 묶여 뒤틀리고 옹이 박힌  

 

* 원제 :  '발자국'이었음을 밝힙니다. 내용도 부분적으로 추고했습니다. (저자)

 

 


 

 

전순영 시인 / 지지 않는 꽃

 

 

 왜군 10만 여명이 진주성을 쳐들어오자 군인과 시민은 한 덩이 바위가 되어 가로 막았지만 다 죽고 말았다

 

 논개는 속으로 뼈를 갈았다 갈고 또 갈았다 날마다 뼈를 갈 때 그 살내음이 몸 밖으로 水蜜桃처럼 단내가 흘러 나왔다 왜장 게야무라가 논개 곁으로 다가오자 논개는 사 알 짝 단물 주르르 흘리며 위암으로 갔다

 

 왜장이 위암위에 오르자 논개는 퍼렇게 날이 선 두 팔로 게야무라를 꼭 끌어안고 남강에 몸을 던졌다 논개는 삼천리금수강산에 지지 않는 꽃으로 활짝 피어나고…

 

 위암은 義巖으로 다시 태어나 지금도 남강에 몸을 담그고 하반신을 씻고 있다 그때 게야무라 몸뚱이가 툭 떨어지던 그곳을

 

 


 

 

전순영 시인 / 비닐

 

 

 숨이 끊어진다는 외마디 소리에 깜짝 놀라 돌아보니 비닐이란 비닐 다 몰려와 우리 어머니 목을 꽉 조이고 있었다 태워도 썩혀도 날마다 눈을 파랗게 뜨고 태어나는 비닐…

 

 나비처럼 날다가 시체로 쌓이는 핸드폰, 충신 컴퓨터, 집집마다 몸종 세탁기, 냉장고, 에어컨 파 한줌에도 너는 따라와서 골목 산촌 어촌 논밭 야산 가슴속 실핏줄 하나 비워두지 못하고 바늘하나 들어갈 구멍에도 비집고 들어와 동족을 키워만 간다

 

 잠도 안자고 코끼리 같이 하마 같이 공룡 같이…한 해 1조원을 삼키고 태어나는 너는 다이옥신으로 우리들의 가슴을 그을리고 있다

 

 


 

 

전순영 시인 / 유골의 말

 

 

 강원도 광덕산 벼랑 속에 묻혀있던 유골들이 쉰아홉 해 만에 말을 하고 있다

 

 열여덟 나는 홀어머니를 남겨두고 자원입대했다 낙동강 전투 서울 수복 평양 탈환까지 나를 바쳤다 남쪽 하늘을 바라보며 어머니 밥 짓는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나는 고향집이 떠올랐다 형은 어디에 있는지… 꿈에서도 보고 싶은 형, 그 형과 나는 3400㎞ 돌아 지금 한강 언덕 위에 나란히 누웠다

 

 돈 있는 사람 백 있는 사람 군대 안 가고, 군 복무 중에도 빼갔다 입대해서 병원에 들어가 있다 제대하고, 미국에 가서 박사학위를 받아 장관이 됐다 나같이 못난 놈들이 나라를 지고 갔다 야간전투 때 전우 몸의 줄을 잡아당겨 답이 없으면 눈물 흘리며 총을 거뒀다

 

 허리케인처럼 밀려드는 중공군과 마지막 순간까지 온몸으로 지킨 조국이었노라고 얽힌 뼈들이 말을 하고 있다 탄알과 탄피 밥그릇과 숟가락 만년필 전투화 약병, 녹슨 철모들이 캄캄한 어둠 속에서 참아왔던 말을 쏟아내고 있다

 

 "나는 죽어 백골이 되어도 이 땅을 지키겠노라"고 광덕산 하늘 아래 유골들의 힘찬 함성이 메아리치고 있다

 

-『애지』 2014-여름호 에서

 

 


 

 

전순영 시인 / 학의 뒤뜰에는

 

 

한 걸음씩 한 걸음씩 학을 따라갔다

해가 달이라고 하면, 달이 해라고 하면 그대로 따라갔다

학과 함께 거닐었다

노래 부르며 놀았다

노를 저어 학의 가슴쯤 들어갔을 때 태풍이 불어와 흔들렸다

나는 속이 뒤집히고 언뜻 언뜻 학의 이빨이 보였다

내 눈을 의심했다

사슴을 만나면 살금살금 다가가 뒤통수를 한입 베어 먹고

사슴이 피를 흘리면 눈을 딱 감고 있다가

옆에 까치가 앉으면 까치 날개를 살짝 뜯어먹고

참새가 곁에 앉으면 참새가슴을 베어 먹고

파리가 앉으면 파리 다리를 뚝 잘라먹고

모은 힘을

여기저기 묻어놓고 또 다른 먹이를 찾는...

학의 뒤뜰에는 사슴 뼈, 까치 뼈, 파리 뼈, 내 뼈가 뒹굴고

 

 


 

 

전순영 시인 / 콧등이 시큰한 그놈

 

 

늘 마음에 걸려있던 그놈을 만나러 교보문고에 갔다

물어보고 또 물어보고 몇 바퀴를 돌아

내 키 보다 더 높은 책꽂이 앞에서

두 눈이 뛰어 올라갔다 스르르 미끄러지고

다시 뛰어오르고 헤매고 다닐 때

그놈이 틈새에 추레하게 혼자 서있었다

손을 내 밀자 놈은 몸을 냅다굴려

내게로 달여 나왔다

두 손으로 어루만지며 콧등이 시큰했다

낯선 곳에 들어와 그동안 이 어미를 얼마나

기다렸을까

걸음마도 제대로 못하는 그 놈을 그

자리에 다시 새워놓고 돌아설 때

엄마 엄마 부르는 소리 내 발뒤꿈치를

따라오고

 

 


 

전순영(全順永) 시인

전남 나주 출생. 1999년 《현대시학》를 통해 등단. 시집 『목이 마른 나의 샘물에게』 『시간을 갉아먹는 누에』 『누가 이 바람을 막을 수 있을까』 『숨』 등. 에세이집 『너에게 물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