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유라 시인 / 은행털이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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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유라 시인 / 은행털이
물컹 밟히는 햇살 소실되어가는 한 점 가을
은행銀杏
한 자락씩 바람을 매만지며 별자리에 관한 책을 읽던 도중 황도 십이궁 천칭자리 동쪽 끝 은행과 별 사이 걸린 고요, 내 신경의 거미줄이 세게 한 번 출렁인 순간
흔들리는 거미줄 안으로 한 발짝 두 발짝 기어코 온 몸을 들이미는 그림자 강릉 시립양로원 앞 뜰 은행나무에 올라간 은행 알 제 안에 들어 있던 막대기의 이미지를 흔들고 있다
바람 한 저락 분탕질로 너무 많이 쏟아지는 남자
-시집 <푸른책> (2005. 현대시시인선)
박유라 시인 / 부풀어 오른 안면도
잃어버린 달의 뒷면이 바다에 빠졌다 보름달이 제 반쪽을 찾으려 가장 크게 몸을 부풀렸다 반쪽은 이미 숨을 수 있는 곳이면 어디든 사라진 뒤였다 망둥이 지느러미, 게의 눈 속, 모래 속으로, 알 수 없는 시간 속으로, 모르는 풍경 속으로
-시집 <푸른책> (2005. 현대시시인선)
박유라 시인 / 가을이 주머니에서 -사진1
찰칵, 낙엽을 꺼낸다 아직 핏기 마르지 않은 부고 한 장 그녀가 입꼬리를 살짝 치켜올려 고양이, 라고 읽으며 1280×960 파인더 밖을 내다보고 있을 때
순식간에 지나가는 한 컷 고양이가 껍질 벗긴 장어 한 마리를 훔쳐 물고 달아난다 명산장어에서 한 칸 공터를 지나 오동도횟집까지 햇살을 파닥이며 바람이 재빨리 불고 간다 피복 벗겨진 고압선처럼 몸에서 꺼낸 한 줄기, 그림자가 시뻘겋게 감전되는 오후 1시 30분 저기 한 칸 빈 주머니에 지-지-직 섬광이 지나갔던 걸까 고요 속에 파들거리고 있는 그녀를 관통하여 찰칵, 낙엽이 진다
박유라 시인 / 꽁치
봄비 속에 문을 연 생선가게에서 꽁치 사려- 외치는 소리 한 접시 너를, 안개 스미는 저녁 내내 또드락또드락 먹고 싶다 물미역 한 장에 바다를 펴고 그 위에 미나리 향을 살짝 찍어 발라 알맞게 깊어진 토막 한 입 크게 씹어먹고 싶은 너를, 나는 아무 슬픔도 없이 간간하게 허기를 뿌려둔다 어둠은 벌써 솜이불처럼 내려 먹어도 먹어도 바람이 스미는 저녁 식탁 내내 꽁치
비에 젖는 목소리 비애 젖는 목소리
박유라 시인 / 침몰
이불이 아주 잠깐 낙하산처럼 부풀다 바닥에 가라앉기까지 그 사이에 배가 희고 등이 검은 낮과 밤이 뒤척였네 하늘이 수면인 듯 떠있을 때 그 아래 펄떡이는 들숨과 날숨 물고기들로 가득한 세계
(가오리는 대왕가오리) 가벼이 떠오른 시간들이 있었고 재호야, 재호야, 해 지는 골목에서 씨앗 같은 이름 불리던 적 있었고 꽃무늬 손수건과 해진 망토들이 아직도 떠내려가고 있을 바다
검푸른 저녁이 밀려와 막다른 골목마다 닻을 내리고 밤마다 죽은 듯 잠들던 이가 어느 밤 잠든 듯 죽은 그날 이후 그 방바닥에 다시는 펴지지 않는 이불 부풀지 않는 낙하산을 끌듯 깊고 어둔 심해 속으로 가오리는 돌아갔네
박유라 시인 / 나무편지
들판에 선 나무는 주소지를 찾아 영원히 가고 있는 편지라고 하면 어떨까
어린 나무 한그루가 대문 앞에 서 있는 오월이었네 막 타오르기 시작한 푸른 불꽃 그때 나는 길을 찾아 나선 연둣빛 편지 한통, 젊은 아버지가 웃으며 햇빛 속에 손을 흔들고 있었네
길을 걷고 들을 지나 어둠 속 눈부신 조명아래 배달된 한 통의 봉인 된 꿈이었다가 빗소리 오래 들리는 아픈 여자의 잠속을 지나 바다가 보이는 사원에서 푸른 물고기를 기다리는 일주문이기도 했던
어떤 투명함에 대한 상상 알 수 없네 지금은 황사 가득한 낮과 밤 낯선 문 앞을 지나가는 중이네 아버지는 보이지 않고 잔가지만 무성해진 나무 한그루 나는 아직 주소지에 닿지 못한 편지 바람 불면 펄럭 펄럭 봉인해 두었던 그리움만 쏟아낸다네
―격월간 『정신과 표현』 (2009년 5-6월호)
박유라 시인 / 점멸하는 겨울 오전 10시 15분
햇빛을 탁탁 털어 청소한다. 락스를 뿌려대면 무균의 햇살 알갱이들이 비수처럼 반짝인다. 텔레비전에서는 ‘히말라야 통신’이 디지털 시험방송 중이고 강아지는 제 그림자를 보며 엎드려 있다. 눈부신 방의 한 순간, 눈썹과 눈썹 사이에서 장면들이 잘게 떨린다. 1000분의 1초 쯤, 화면 티벳의 흰 돌집과 화면 밖 강아지 숨소리, 그 아리아리한 것들을 포를 뜨듯 살짝 저며 낸다면, 30도 각도로 칼집을 넣는 소리는 나지않게, 피 한 방울도 나지 않게, 겨울 오전 10시 15분의 적막이 난자당한다. 소리 없이 점멸하는 나날들,
날 선 햇살이 눈물 나게 한다.
박유라 시인 / 붉은 도미의 저녁
뜨겁게 달구어진 프라이팬 위로 지옥의 순간들이 지나가고 있다 수평선을 내달아온 검은 바람이 칼끝에 돋고 지글지글 내장까지 다 태워 붉은 구름들이 하늘 밖으로 끓어 넘치는 저녁
어스름 사이로 냄새가 먼저 지나가고 가을장마 뒤 제사가 다가올 무렵 저 향기로운 식탁 위에 가뿐히 오르기 위해 죽은 자가 건너가는 가장 확실한 징후 냄새는 집요하다
발기발기 찢기고 뜯기는 향연이 열리는 곳곳마다 폐허가 되고 기억은 해초처럼 검게 너풀거린다 몇 개의 바다와 강풍을 아슬아슬 넘어왔을 아련한 추억과 무거운 회한들 그것들을 발라내고 한 때 도미라 불리던 것들 구름이라 불리던 것들 바람 속에 그 이름이 짓이겨져 흔적이 없는 식탁 너머 저 멀리
이제는도미가아니다아버지가아니다아무것도 아니다너도아니고나도아니고아닌것도아닌
저녁의 입구에 서서 소리 없이 꽃들은 뚝뚝 목을 꺾고 붉은 목구멍이 하나 캄캄하게 닫힌다
박유라 시인 / 그 순간의 나비떼
늙은 경비원이 비질하고 있다 비 쏟아지기 직전 마당이 팽팽하다 한 발짝 건너 갓 씻어 놓은 하얀 접시들 잠시 하늘이 얼비치고 간
엄마는 폐경기였고 노을 한 국자씩 풀어 붉은 국을 끓이는 저녁마다 어둠은 화단을 넘어와 마루 끝을 핥았다 시간의 모서리가 자욱이 부서져내리던
생각나지 않는 록밴드 이름처럼 보이지 않는 먼 곳으로 스러져 간 구름들 점점 밀려오고 부풀어 오르고 드디어 쏟아지는 빗소리 세상의 접시들 왕창 왕창 깨지는 저, 믿을 수 없는
나비떼 그 순간을 엄마는 모란이라 불렀을까 작약이라 불렀을까
부서지는 음악 나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초경 중이었다
ㅡ 격월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 2007년 5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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