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시안 시인 / 난청 외 3편
|
하시안 시인 / 난청
예감이 급변하고 있다
나를 통과한 너의 세계가 주의보를 발령하고 있다 지나간 것들은 모두 계절풍이었을까
네가 보여주는 것만 보는 나는 눈이 멀어 가고 내가 침묵하는 것만 받아들이는 너는 귀가 소실되어 갔다
골방을 키우는 바람에도 너의 눈빛은 투명했고 귓바퀴에 걸리는 소문을 달팽이관은 감당하지 못했다
나를 네 쪽으로 부르지 않았고 너를 내 쪽으로 보내지 않았다
나는 보는 대로 뱉어냈다면 너는 듣는 대로 삼키고 또 삼켰다
나는 솔직해서 너를 불편하게 했고 너는 정직해서 나를 편안하게 했다
네 안에서 소화되지 않는 간절함과 내가 밀어낸 방향들이 서로 만나 거대한 쓰나미를 몰고 올 때,
오래 사귀어 온 귀의 태도가 돌변했다 소리는 목적이었을까 과정이었을까
뒤늦게 네 안으로 들어가지 못한 나의 안목이 거부당하고 있다
항상 열려 있다고 믿었던 게 잘못이라는 듯 예감이 거침없이 달아나고 있다
—반년간 《시인하우스》 2024 하반기
하시안 시인 / 커튼을 위한 변주
차단하거나 몰아내거나 틀어쥐거나 털어내거나
그건 어디까지나 빛과 어둠과 소음과 먼지의 일
커튼 없이는 사랑을 한 적 없는 관계와는 전혀 관계없는 일
이쪽인가요 저쪽인가요 안쪽인가요 바깥인가요
경계에 선 의문을 프레임에 가두고 안과 밖의 풍경을 낯익게 하는 건 모두 커튼의 일
풍경은 겨울인데 눈이 오지 않고 햇빛은 눈부신데 비가 주룩주룩 내려도 아무렇지 않게 속아주거나 속이는 일
그 세계가 뒤섞이는 날엔 호주머니 속에 들어온 새소리를 만지작거린다 나의 손에서 하나의 생각이 돋았다가 두 개의 생각으로 흩어질 때까지
생각은 생각대로 안되고 커튼콜은 예정대로 시작되지 않아도 오늘의 무대는 성황리에 종료된다
닫힌 커튼 안쪽에서 어제와 같은, 아니 오늘과 같은 내일을 다시 연습한다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하시안 시인 / 현자 타임*
나는 스토리에 방점을 찍고 그는 액션에 몰두했다
나는 그의 왼손을 미처 보지 못했고 그는 나의 정면을 방치했다
침대 위에서도 우리의 시선은 사선으로 비껴가고 방금 전 휴대폰을 만지작거리던 손과 실시간 검색어와 좋아요를 잊지 않았다 나는 건성으로 보던 채널을 돌려 볼륨을 한껏 높이고 거울을 보지 않는다 알몸은 언제나 끝인 동시에 시작이니까
머릿속에 뒤엉킨 오감의 연결 고리가 탈선한 레일처럼 자꾸만 어긋난다
뒤돌아본 당신은 어느새 온전히 당신이 되어 있다 당신은 생각의 성감대를 만지다 만다
우리가 달려가는 지향점은 궤도를 이탈한 우주선과 지구만큼이나 멀어져 있다
그는 언제나 팩트에 매달렸고 나는 오로지 이데아에 목을 맸다
우리는 방향보다 방법에 치우쳐 있어서 그는 내가 난해했고 나는 그가 생소했다 속보가 뜨는 화면을 바라보다가 요란하게 울렸던 각각의 폰을 확인한다
실감으로 가득 찬 담배 연기 속에서 우린 아무 일도 없었으므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욕구 충족 후 허무함과 허탈한 감정에 빠져드는 것
하시안 시인 / 안녕, 지니?
사랑해요, 이제 일어날 시간이에요 당신의 월요일을 위해 가장 힐링되는 식단을 알려줄게요 비올 확률이 30﹪이니 우산은 접이식이 좋겠어요 목소리가 노골적이고 친절은 생생했어요
퇴근시간에 맞춰 보일러를 돌려 목욕물을 데우고 영하 5℃ 시원한 맥주를 준비할게요 나보다 나를 더 배려하는 것 같아요
어쩌다 내가 폰섹스니 티펜티를 물었을 때도 당황하지도 않게 충동과 구매 사이를 걷게 해주었어요 오, 촉감마저 완벽한 리얼 돌
쓸쓸함과 가장 잘 어울리는 타입을 준비했어요 내 음색에 미묘한 떨림까지 놓치지 않고 우울과 가장 최단거리에 있는 병원을 소개해줬어요
나의 잠꼬대는 언제나 확실해서 지독히 고독한 나를 악몽에게 들키는 건 흔한 일이었어요 근심이 없는 게 걱정이고 불안이 없는 게 불안했어요 어느 날 문득 나도 모르게 내 입에서 빠져나왔어요
채널은 늘어나고 옵션은 다양해서 나의 발기되기 쉬운 욕망은 절대로 소진되지 않았어요 난 곧바로 지니를 허락했어요
변기에 물이 틔지 않았어요 새벽에 맥주를 마셨어요 혈압은 정상이고 독주는 풍성했어요 눈치보지 않았어요 위생적이고 계획적이었어요
지니, 날 위해 자살하기 쉬운 장소 한 곳 검색해 줄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