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손은주 시인 / 약속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2. 22:31

손은주 시인 / 약속

 

 

봄볕이

젖은 씨앗을 말려요

아가미가 없는 물의 숨으로,

물갈퀴처럼 휘어진 손 마디에 거꾸로 매달린 중력을 견디며,

빛의 파장도 견디어야만 해요

보고 있나요

당신에게 스며드는 풀흰나비의 군무

이미 뼛속까지 비워줬으니 이젠 날기만 하면 돼요

언 땅 위 곁가지로 자란 꿈들 하얀 기지개로,

우리 새로 돋아나요

보고 있나요

돛새치처럼 뻗어 오르는 새의 깃

나와 당신, 함께라서

눈물 속을 지나 날아갈 수 있는, 우리

한 번의 턴이 중요하죠

캄캄한 밤은 돌아보지 마요, 이제는

뜨거운 불의 고집이 필요할 때예요

지금이에요

물비늘을 털고 움츠린 날갯죽지를 펴요

멍든 일상은 던져버리고

햇살 푸른 숨으로 날아올라요

거기, 그림자 위

견딤의 꽃, 위로

우리, 오늘부터

살포시 피어나는 거예요

 

(영남일보 2020.3.16.)

 

 


 

 

손은주 시인 / 새우깡에선 늙은 호박 냄새가 난다

 

 

아, 올해도 할머니가 오셨구나

샛노란 호박꽃 흐드러지면

가슴 한편 묻어 둔 흙담 위에서 웃고 계시 는 할머니

 

어린 시절, 넝쿨째 굴러다니다가

새우깡을 좋아하는 할머니를 위해

내川를 건너 구멍가게가 있는 건넛마을

뛰어가곤 했지

할머니의 호박전에 홀딱 반한 내가

그 달콤한 맛 혀끝에서 사라질 때까지,

 

몽글몽글 피어난 하얀 가슴 스무 살

집 떠나올 때 할머니가 주신 새우깡 봉지마다

노릇한 호박전 한가득이었지

 

"버스 안에서 출출해지면 먹으래이"

새우깡 빈봉지를 하나씩 모으셨던 것

 

할머니는 몇 해 호박전 더 뒤집으시고

풀흰나비처럼 날아가셨네

 

호박넝쿨 뻗어가는 저 누런 가을이 오면

습관적으로 새우깡 한 봉지를 사지

새우깡을 뜯으면 늙은 호박 냄새 묻어나고

하얗게 센, 쪽진 머리 할머니 덤으로 들어와 있네

 

 


 

 

손은주 시인 / 진실게임

 

 

젖가슴에 초점을 맞추라는 예언이 있었다

 

과녁 밖으로 나가지 못한 전갈,

좁혀져 오는 원 속에서 꼬리를 하늘로 치켜들고 독침을 꽂는다

자살과 타살의 글자가 어긋날 때 일몰과 몰락도 어긋난다

 

그녀와 전갈은 데칼코마니처럼 닮아있다

 

달빛 속으로 흘러간 독이 무섭게 그녀를 삼킨다

혀로 물든 세계는 멸망하리라!

 

전갈의 정체성이 의문으로 타오를 때 독은 먹어야 하는 걸까 퍼뜨려야 하는 걸까

 

바람은 공중에서 술렁거리고 지워진 것들의 춤으로 별은 돋아난다

예언자 당신은 독을 가진 운명이라 붉은 젖가슴을 물었던 것일지도,

패배의 눈물은 등의 부스럼을 핥아 먹는다

민낯의 꿈은 작열하는 태양으로 돌아갈 것이다

오, 오, 오! 굴러가라 경전이여!

 

화려한 머리카락은 자라지 않을 것, 행성에 더 이상 독이 퍼지지 않을 것

죽음이 목전까지 도달했지만 아무도 슬퍼하지 않을 것

 

전갈의 자살은 회자되고 클레오파트라 꼬리에 노을이 새겨졌지만,

 

아무도 그녀를 죽이지 않았다고 한다

 

 


 

 

손은주 시인 / 풍경(風磬)

 

 

동백꽃이 흔들려

 

춤을 춘 건지

 

흔들린 내가

붉은 당신 안은 것인지

 

 


 

 

손은주 시인 / 급하게 망고를 먹었나요

 

 

Da Capo al Fine

숨 가쁜 되돌이표에 출렁이는 음의 높이

 

잎사귀에 숨은 자궁이 재스민 향기 가득한 바다에서 새어나와요

얇은 유전자 띠를 지나 꽃자루의 아픔이 묻어나는 시간

 

물의 악보를 펼쳐요 손끝으로 피어난 섬의 노래를 불러요

얼룩무늬 지느러미가 퇴화 될까요

 

망고나무 속 쌍꺼풀 없는 눈동자가 숨어 있어요

바람의 수액이 나무를 오르면 코피노 아이가 자라나요

 

열두 색 크레용으로 그려놓은

알로야의 슬픈 전설 보홀섬 초콜릿 힐 이야기는 열매가 되죠

바다를 건너간 아빠는 치노팬츠를 입고

망고나무에 파고드는 엄마를, 알로야를, 초콜릿 힐에 버려두었어요

 

애써 물의 수압 들어 올리지 말아요

두 손 적신 즙액에서 비밀스런 당신 지문이 살아나요

 

노란 즙이 당신에게로 스며들면

Da Capo al Fine, Da Capo al Fine

돌아올 거란 거짓말을 반복해요

 

코피노 아이들이 언덕을 오르고 있어요

바람을 움켜쥔 실루엣 옆 떨어진 망고 씨

 

급하게 먹지마세요

망고는 저절로 익어가죠

 

 


 

 

손은주 시인 / 페르소나

 

 

애인은 달의 뒷면이 좋다고 십 원짜리 동전을 뒤집고

나는 날마다 레깅스 앞쪽을 신경 쓰지

 

내가 얼룩무늬 날개를 편 날,

우린 얼룩말 색에 대해 이야기했어

 

그 무늰 위장 효과가 만점이었거든,

푸른 바지들 눈에 잘 띌 뿐이라며 씁쓸한 미소로 펄럭였어

 

화려할수록 꼬이지 않는 색의 비밀

흡혈귀가 있는 한 얼룩말 논쟁은 계속될 거야

 

푸른 초원에 레깅스 입고 바람처럼 나도 달릴 거야

꽃들은 여전히 아름다워

 

이쯤에서, 맛있는 색 끌어당길 때 마그네트 스위치 눌러줘

 

첫눈에 반한다는 것

 

썸과 연애쯤에서 재빨리 벗겨진 위조지폐 같은 것

 

디 카페인 라떼를 좋아하는 그,

브런치 세트 나눠 먹는 순간 가면은 따가워

 

요동치는 밤의 페르소나 짙어가는 당신의 얼룩

나이프에 올라탄 포크의 길들여지지 않은 무수한 고민

 

색은 비벼야 좋은 거야,

저기 달빛 CCTV에 스캔 된 놀라운 얼굴 좀 봐!

 

 


 

 

손은주 시인 / 내 친구 영심이

영심아 마키아토 한잔 하자

오늘의 날씨는 얼룩이니까

 

크레마에 우유거품이 잔뜩 들었어

천만 원 샤넬백 하루 십만 원에 빌려 가는 MZ세대

 

알까?

 

대파 속에 양파의 눈물이 있다는 것 알까

 

파란이 만든 허상 구둣발에 모여들고 있어

고가의 명품시계는 렌탈 서비스도 생겼대

저것 봐, 하강하는 나뭇잎, 그래도 돌아가는 세상

 

오늘의 된장녀와 내일의 귀족녀는 잘 구분해야지

스타벅스에선 여자들이 골상학을 연구한대

안녕, 구겨진 셔츠는 반드시 코인세탁소로!

 

지평선 너머엔 달달 무슨 달,

컬러풀 네일 그라데이션 길쭉한 다섯 손가락

손톱 달이지

여우의 본능 어쩔 건데,

색채심리 놀이는 그만하자

부러지고 날개뼈가 사라지면 어쩔 건데 넌?

 

발목이 욱신거리고 뼛속 깊숙이 끊어진 뇌가 부풀면

비가 올 것 같아 영심아,

 

뼈대만 앙상한 자동차를 타고 오늘도 어쩔 건데 넌?

 

내 친구, 허영심, 근데 넌 어쩔 건데?

 

 


 

손은주 시인

경북 의성 출생. 대신대학교 종교교육학과 중퇴. 한국방송통신대학교 국어국문과 졸업. 2022년 《시와 사람》 신인상을 통해 등단.시집 『애인을 공짜로 버리는 법』. 전국여성문학 시 부문 최우수상, 문열공 이조년 선생 추모 전국백일장 대상. 2020년 동서문학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