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고은강 시인 / 여자의 나이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3. 15:03

고은강 시인 / 여자의 나이

 

 

생이 소진될수록 아름다워지는 시간 앞에 서 있다

내 입 속의 미혹(迷惑)이 달아 또다시 혼기가 차오른다

 

항상 사랑한다,

그것이 내 나이인 줄 알아다오.

 

-『문장웹진』 2011. 12월호

 

 


 

 

고은강 시인 / 일백 년 동안의 오늘

 

 

 밤 11시 59분에 뛰어내릴 거예요 그대의 시간과 내 시간의 오차가 있을 수 있겠지만 자정엔 그대의 폐부를 어지르는 불꽃이었으면 해요

 

 오늘이 나보다 더 오래된 생을 가졌다한다 오늘이 가도 오늘이 남는 생, 말하자면 일백 년 동안의 오늘을 가지고 태어난 날도 오늘이었고 나는 다만 오늘의 산책자 중 하나일 뿐 영원이 아니다 파랗게 응고되어가는 유리창, 오늘은 비가 내렸고 오늘은 비가 그립다 오늘은 네가 있고 그러나 오늘은 네가 없다 네가 없어서 마음은 대기를 가질 수 없고 너를 낭비하여 쏟아 부운 울음은 목에 걸리지도 않고 흘러나간다 애초에 시간이 아닌 네가 오늘의 존재일 리 없고 나의 소멸이 너인 줄 오늘은 알았으랴 오늘의 부음이 오늘에 당도할 때까지 못 견디는 것이 시간이라 걷는다 한시름 한시름 발육하듯 흘러서 내 신경질적인 촉수가 봉분처럼 뚱그스름해질 때까지 시간의 귓바퀴 꼭꼭 깨물며 걷는다

 

 밤 11시 59분에 뛰어내릴 거예요 그대의 시간과 내 시간의 오차를 이해하며 일 분 동안 낙하하고 찰나에 스치겠죠

 

 


 

 

고은강 시인 / 발톱

 

 

1

그녀의 칼은 구부러져 자랐다 바깥으로 서지 않는 날이 살을 찢으며 안으로 파 들어가는 병, 유전이라 했다

 

구부러진 칼에 제 살점을 떼어주는 고통으로 자식은 직립을 하고 그러고도 쉼 없이 녹슬고 구부러지다가 어미로 죽는다는 병, 버려져 서도 어미로 죽어야 산다

 

새끼가 없이도 젖을 만드느라 온몸이 시린 암캐처럼 잠버릇이 둥근 병, 아름답게 지켜주는 건 남자의 일

 

2

이십 오년 만에 허락된 그녀의 귀갓길은 추웠다 뾰족구두도 못 신는 굽은 발가락을 퇴락해온 길의 마지막에 담아 온몸을 절뚝거리며 온 여자, 버려져서도 자식의 냄새를 어슬렁거리더니 누런 껍질로 돌아와선 언 발이 식기 전에 제상에 술을 따르고 귀소본능처럼 잔뜩 구부러진 절을 한다

 

엄마, 칼의 굳은살을 벗기며 눈물이 되는 등신 내게는 주지 마라 사랑으로 헛배가 불러오는 여자를 토악질해대며 나는 아버지 성을 버렸지

 

-<시인시각> 2008년 봄호

 

 


 

 

고은강 시인 / 비문(非文)들

 

 

 입술을 공백으로 남겨두었더라면 말은 세속화되지 않았을 것이다 만져보면 입술은 차고 습한 사물이다 언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랄산맥을 오르는 깜차까반도의 길들여지지 않은 사나운 순록이었고 그때 우리에게 아버지 따위는 없었다 언어가 아직 태어나지 않았을 때 우리는 우리의 야만과 혼례를 치르고 옛날을 달리는 짐승처럼 신성했고 그때 우리에게 두려움 따위는 없었다 마침내 삶은 불멸로 불멸로 타락했고 마침내 삶은 아버지라는 궁리로 전락했다 그리하여 오늘은 불임의 태초, 아무것도 수태하지 않는 말들의 순례는 시작되었다 이 말이 다형체다 언어는 언어와의 교미만을 지향한다 만삭의 밀어들이 새카맣게 말라 죽을 때까지 입속의 내 말이 다형체다 당신은 현재에서 현재로 불멸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에게로 회귀하는 자, 신화여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당신의 화법이 내 입속의 내 말이 다형체다 당신은 현재에서 현재로 불멸하는 중이다 그러므로 당신은 당신에게로 회귀하는 자, 신화여 미래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는 어원으로부터 너무 멀리 왔다 당신의 화법이 내 입속의 혀처럼 부드러워서 이 말이 다형체다,

 

 부르는 대로 피어주마

 

 


 

 

고은강 시인 / 포도꽈리

 

 

초경을 하고

내 머릿속에

가려운 수포들이 자라기 시작했다

엄마는 손톱 밑에 까만 물이 들도록

포도알을 먹고

포도껍질로 꽈리를 만들어서 불었다

당신이,

과자처럼 바삭거리면 좋겠어

뚝뚝 안 흘러내리면 좋겠어

나를 물들이지 않으면 좋겠어

혀가 짓물러

새어나오지 않는 발음이

초경을 하고

나는 꿈속까지 가려웠다

내가 사랑한 소녀,

사랑한 만큼 비난한 여자,

개나리 같은 계집애 얼굴

한 송이 따다가 너에게 덮어준다

엄마는 보풀보풀 지문이 일도록

포도알을 먹고

포도껍질로 꽈리를 만들어서 불었다

당신은 알맹이를 잃고

나는 알맹이가 없고

포도가 실한 날,

빈 눈망울만 버적버적

서로 눈이 맞다

잠이 든다

 

-『서시』 2009년 여름호

 

 


 

 

고은강 시인 / 빌렌도르프의 비너스*

 

 

 너는 쳐들어와라 나는 역류하겠다

 

 만월의 태동을 목 조르며 무호흡으로 까맣게 만개하는 이 싱싱한 뉘앙스를, 감각을, 관람하면

서 어른거리면서 툭하면 뜨거워지는 역심의 버릇으로 팝콘처럼 튀겨진 미완의 거짓말들, 씹고,

뱉어서, 파르르 해일이 몸서리치는 내 푸른 치마폭에 세상의 사내를 수렵해, 적멸하듯, 불모의

꿈이나 꾸면서 세상이여 내가 어떻게 놀아줄까

 

 벗겨봐, 파닥파닥 발아하는 내 아름다운 각질을

 

*작성자 주; 1909년 오스트리아 빌렌도르프 지역에서 한 고고학자에 의해 발견된 조각상 실제크기 약 11cm정도, 약 2만년~1만 5천년 전 구석기시대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됨

 

(시평, 2007, 봄호)

 

 


 

고은강 시인

1971년 대전에서 출생. 상명대학교 국문과 대학원 박사과정 수료. 2006년 제6회 《창비 신인시인상》을 통해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