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박금성 시인 / 탑 외 6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3. 15:56

박금성 시인 / 탑

-원원사지 동 삼층석탑

 

 

그는, 바람과 구름이었으나

소원의 흔적

 

오로지, 하나의 소원

더 나아갈 수 없는 곳을 향하여

쩡쩡, 땡볕을 가르며

오르는 길을 만들었을 것이다

 

층층이 쌓이는 셀 수 없는 갈등과

선명해지는 사랑들

그럴수록 굳게 다듬어지는 불퇴전의 결연

 

그는 구름처럼 지워지고

바람처럼 잊혔어도

운명이 나아갈 수 없는 곳에서

눈과 손이 멈추어야 할 곳에서

탑의 수연에 마음을 가두었을 것이다

 

지금도 그의 소원이

더 높이 오를 듯 하늘이 파랗게 열리는데

 

무명에 탑신의 옥개가 떨어져 나가고

벽력에 옥신이 흔들려도

오르고 오를 듯 원력을 다시 세우는데

 

그래, 활화산이 탑을 덮친들

그의 소원이 끊기겠느냐

미래가 다하여 세상이 멸한들

그의 원력이 멈추겠느냐

 

밤을 달리는 어둠이여!

낮을 달리는 빛이여!

불멸의 소원이여!

 

-『시현실』 2023-여름(92)호

 

 


 

 

박금성 시인 / 사철 내리는 비

 

 

어두운 골목 여동생이 건네는 빵 봉지 소리

 

동생의 생떼에 엄마 옷소매 찢기는

 

창문에 사선으로 얼비치는 엄마의 머릿결

 

꿈속에서 대숲을 내려오는 밤 고양이

 

어스름한 저녁 점점 멀어지는 친구의 발걸음

 

후드득후드득 떨어져 내리는 보고 싶은 사람

 

 


 

 

박금성 시인 / 그를 다시 찾은 자리

 

 대빗에 매여 마당을 쓸면 초록 음색으로 노래를 불러주던

 주저앉아 손가락으로 집을 그리면 왕눈 같은 꽃을 떨구어

 지붕을 만들어주던

 등 기대고 앉아 눈을 감으면 내가 기억하는 이름 하나하나를 불러주던

 어떤 이름을 되뇌면 목말을 태워 멀리 떠나는 새를 배웅하게 해주던

 부르고 싶은 이름을 부르지 못한 날엔 빨간 가슴을 뚝뚝 떼어 주던

 석양보다 더 붉은 눈으로 시선을 허공에 두면 시리다 춥다 옷을 벗어주던

 내가 집을 떠나던 날 그림자를 감추지 못하고 내 앞을 한참 가로막던

 그의 그림자를 따라간 그곳에 나이테 희미한 나무 밑동이,

 잘려나간 나의 과거를 밀어 올리고 있었다

 부르지 못한 이름이 마당을 달리고 있었다

-계간 『다층』 2023년, 가을호 발표

 


 

 

박금성 시인 / 무늬 속 껍질

 

 

거역할 수 없는 자의 밀고 당긴 힘을

기록하고 있는 바닷가

얼마나 오랫동안 이곳에 있었을까

무늬가 빠져나간 조개껍질, 등을 밀어 올린 채

모래에 박혀 있다

 

겨울 철새들이

단련된 부리로 딱딱한 역사를 쪼아대면

오래전에 죽은 소리를 불러오는 조개껍데기

 

새무리, 파도의 춤을 따라 멀리 날아간 뒤

모래 둔덕을 비질하는 바람

게으른 햇빛이 조가비를 더듬는 오후

 

오래된 무채색 관이 열리고

수많은 조탁을 견뎌낸 풀게가 태양을 끌어당긴다

 

수평선 높이만큼 다리를 세운다

모래알 붙은 더듬이가 금파처럼 넓게 터진다

 

월간 『우리詩』 2023년 4월호 발표

 

 


 

 

박금성 시인 / 시간 밖에 있는 새벽

 

 

바람과 시간이 정지된 채

촛불이 움직인다

죽을 것처럼 눕는다

 

새벽이 흔들리고

그 사람

작아지고 커진다

 

불의 유령에

눈동자가 새까맣게 타도

지친 그림자는

 

흔들려서 설 수 있는 것처럼

미움이 있어 사랑할 수 있는 것처럼

어둠이 있어 빛이 있는 것처럼

정해진 공간이 있어

시간 밖으로 뛸 수 있는 그는

 

어느 곳에서든

높게 서서 흔들리며

작아지고 커지리라, 촛불처럼

 

웹진 『시인광장』 2023년 6월호 발표

 

 


 

 

박금성 시인 / 해어름

 

 

노을 춤추는 서해

 

석양의 꼬리를 바라보는

해어름의 두 연인

 

황혼을 놓아주려는 바다

잡으려는 물마루

두 연인을 감는 바다

 

사람을 배웅하는 멍든 손짓

 

노을빛 저무는 검은 눈의 물비늘

 

-『불교신문/문태준의 詩 이야기』 2022.06.21.

 

 


 

 

박금성 시인 / 정혜사 노적바위

 

 

정혜사를 오르던 작은 지게들

이젠 웃음소리 들리지 않습니다

 

불유각佛乳閣차디찬 석수, 그대로

옛날입니다

 

꿈꾸듯 노적바위에 오르니

아이들 곶감처럼 널려 있습니다

금성은 젖은 옷을 털고

동군은 고무신에 얼굴을 묻고

성일은 그림을 그리고

재구는 배탈 나 누워 있습니다

 

태양에 맞서 오줌 싼 옷을 털고 싶습니다

동군의 고무신을 닦아주고 싶습니다

성일의 못다 한 그림을 그려주고 싶습니다

재구의 탈 난 배를 만져주고 싶습니다

 

노적바위는 감나무였습니다

코를 열면 감꽃 향기가 났습니다

 

노적바위는 아늑한 엄마였습니다

팔베개하고 누우면 재워주고

귀를 대면 심장 소리를 들려주었습니다

 

지금 그는 노스님입니다

웅─ 웅─ 과거에 갇힌 아이들을

불러냅니다

 

지게보다 더 큰 내가

바위와 가슴을 맞춥니다

 

 


 

박금성 시인

1963년 충남 아산 출생. 중앙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8세에 예산 수덕사 입산. 도신승려, 서광사 주지. 2020년 계간 《서정시학 》 신인상으로 등단. 시집 『웃는 얼굴』. 충남 시인협회상 수상. 수덕사 성보박물관 관장. 2020년 충남시인협회 신인상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