육근상 시인 / 길손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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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근상 시인 / 길손
헐거워진 꼭지 틈타 한반중문 두드리는 소리
재들도 엄니 보구싶었던 게지 그렇지 않구서야 오트게 우산도 없이 여기까지 왔겠어 이 밤 문 두들기는 손은 얼마나 다급한 길손이겠어 엄니는 일년전 떠났다지 뭐니 나무로 돌아갔어도 벌써 돌아갔을 시간이겠지
꼭지야 개수대에 앉어 그만 훌쩍거리구 엄니 오셨나 삽작거리 나가보그라 비 그치구 보름달 장독대 환하거든 먹감나무 이파리로 오신댔거든
눈 어두워 귀뚜라미 짚고 오신댔어 어치도 데리고 오실지 모르겠다
육근상 시인 / 백 년 향기
목에 호스를 심은 식물이 왔네 금방 떨어질 것 같은 한 꽃송이 달고 뽀글거리며 침대째 내게 왔네
숨 한 번 쉴적이다 식물은 가는 허리로 발목으로 동그란 눈으로 갸릉갸릉, 흰 나비 부르고 상심한 남자는 굵은 손으로 눈물 찍어내며 꽃자리 지키느라 안간힘이었네
겨우내 떨어져 살며 꽃 피우고 새 화분으로 옮겨갈 막다른 허공 잡다 댓바람에 목 꺾인 몸부림은 얼마나 힘든 외로움이었나
시든 꽃에도 향기는 있네 백년 식물에서만 느낄 수 있는 깊은 향기네 마지막에는 나도 저 향기로 돌아가야 하네 컴컴하고 서늘한 곳으로 들어가 이제는 다시 돌아오지 말아야 하네
육근상 시인 / 동담치(東譚峙)
처음은 검은색이었는데 강물 거슬러 오르는 꺽지 보내 비늘빛 그려 넣었다
여름 이겨낸 바람이 곧게 가지 세우고 소나무처럼 잠깐 서있다 고샅으로 사라졌다 미루나무가 서쪽으로 휘어진 까닭은 새떼가 노을 몰고 우르르 내려앉았기 때문이라 했다
벌겋게 익은 강이 김 모락모락 피워 올려 가을 다 흘러가버렸다 쪽창 열고 동담치(東譚峙) 헤집어 보라 일러두었다 밤새껏 머뭇거리다 돌아갈 길 묻던 등 굽은 노인이 큰기침 몇 번 하자 수런거리던 이파리들이 뒤뜰에 조용히 내려앉았다
육근상 시인 / 벚꽃 설렁탕
아흔다섯 되신 날맹이집 할머니 휠체어에 앉아 설렁탕 한숟가락 드시는디 놋숟가락 쥔 손 덜덜덜 떨면서 입으로 가져가지 못하고 자꾸만 턱으로 흘립니다
그걸 가만 보고 계시던 아흔하나 울 엄니 밥 한숟 뜨시고 엄지손가락만 헌 깍뚜기 밀어넣어 한참 오물거리다 밥그릇 뚜껑에 뱉어놓고 아이구 저렇게 되지 않을랴먼 빨리 가야는디 애덜 고생시키지 말구 빨리 돌아가야 하는디
아이구 누가 들으면 오짤랴구 그려어 언니두 시방 저려 언니두 저렇다니께 깍뚜기 안깨물어져 틀니는 어따 놓구 왔어 말아서라두 드셔 언능 들기나 허셔 냘모레 팔순이신 이모가 안달이나 밥한그릇 말아 밀어 넣는디 수리먹은* 목소리로 말어 넣는다 벚꽃이 뚝배기 속으로 호호호 날립니다 나도 모른 척 벚꽃 설렁탕 한그릇 말어봅니다
*판소리 특유의 쉰 목소리
육근상 시인 / 滿開만개
꽃놀이 갔던 아내가 한아름 꽃바구니 들고 흐드러집니다
선생님한테 시집간 선숙이 년이 우리 애들은 안 입는 옷이라고 송이송이 싸준 원피스며 도꾸리 방 안 가득 펼쳐놓았습니다
엄마도 아빠도 없이 온종일 살구꽃으로 흩날린 곤한 잠 깨워 하나하나 입혀보면서
아이 예뻐라 아이 예뻐라
육근상 시인 / 호미고개
칼국수 한 그릇 먹고 나오는데 주인아줌니가 계산대 앞에 양말 쌓아 놓고 한 켤레씩 가져가란다 웬 양말이냐 물으니 묻지 말고 맘에 드는 색깔로 골라 신고 다니란다 벌건 국물에 쑥갓 집어넣고 뒤적거린 얼큰이 칼국수 닮은 색깔 하나 골라 얼마냐 물으니 먹고 살기 힘든 세상 여기까지 오신 손님 드리는 선물이란다 칼국수 한 그릇 팔아 얼마 남는다고 칼국수만큼 비싼 양말 공짜로 주느냐 천원이라도 받으라며 거스름돈 건네자 극구 사양이다 거참 이상도 하시네 갸웃거리는데 다음 손님도 그 다음 손님도 맡겨 높은 양말 찾아가듯 한 켤레 씩 들고 흡족한 표정이다 받은 선물은 주신 분 생각하여 함께 뜯어보며 기쁨을 나누어야 배가 되는 법 양말 갈아 신는데 심부름하는 아줌니가 바라본다 그 양말 뜨뜻허쥬 호미사는 사는 아자씨가 놓고 간 슬픈 양말이래유 돌아서는데 효끼 아저씨 여기까지 오셨나보다 구루마 배로 밀며 울고 넘는 호미고개 잘도 넘어 가더니 기어이 넘어 가셨나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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