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봉식 시인 / 연정 외 8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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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식 시인 / 연정
큰일 날 뻔 했습니다 불타오르는 연정
하마트면
당신을 다 태워 버릴 뻔 했습니다
김봉식 시인 / 하루라는 책(안부)
나는 오늘도 하루를 열어 아무일 없는지 확인하고 책을 덮었다네 아무것도 안 써있어 별일 없으리란 생각이지만
자꾸 열어 본다네
점심에도 저녁에도 또 바보처럼
자네의 안부가 궁금해서
김봉식 시인 / 안 믿을까봐
꽃보다 이쁘다 하면 안 믿을까봐 매번 이쁜 꽃만 보면 그대 같다 합니다 그래야 믿을 것 같아서
꽃이 많아 참 큰일입니다 그래도 안 믿을까봐
김봉식 시인 / 시장떡
어머니의 입이 벙긋하다 떡 한점 잘라 드시곤 이것도 요것도 조것도 맛있다 참 맛있구나
아버지는 떡 한입 무표정이다 맛이 있나요? 웅 웅 끄떡 끄떡
이것도 요것도 조겄도 잡수어보세요 맛있습니다
난 아버지의 한입 또 한입 꾸역 꾸역 기억을 잡수시는 입 모양을 그저 우두커니 바라 보아야만 했다
김봉식 시인 / 갑각류에게 바치는 헌사
아내가 벽속으로 사라졌다
술 취한 내가 아내의 메마른 가슴을 자괴의 망치로 쿵! 쿵! 내려칠 적마다 말수가 적어진 아내는 홀연히 벽을 열고 들어가 빗장을 굳게 걸었다 갑각류가 되었다
실직의 나날이 거듭될수록, 벽 너머에선 흐느낌이 자주 들려왔다 상처가 벽을 키우고 벽이 상처를 더욱 외롭게 한다는 걸 깨달았을 땐 오랜 침묵만 소통되고 있었다
일용직 직장에서 첫 일당을 받던 날 아내와 아이들을 데리고 외식을 했다 하루치 일당을 탁탁 털어, 변두리 식당에서 꽃게찜을 먹었다
나는 붉은 꽃게의 껍질을 까서 아내의 입속에 흰 살을 넣어주었다 갑각류의 아내가 벽을 열고 나와 활짝 웃는다
왕벚나무가 흰 쌀을 마구 뿌려대는 눈 부신 봄날이었다
김봉식 시인 / 외판원
하나님이 가라사대 빛이 있으라 하시매 발이 있었다 발이 닿는 곳은 땅이라 불렸고 발이 닿지 않는 곳은 허공이라 불렸다
그가 발걸음을 뗄때마다 지옥문과 천국문이 번갈아 강림했다 그가 매일 마침, 구두를 정성스레 닦는 것은 구두가 아닌 발에 대한 예배였다
그는 왜소한 발로 거대한 지구본을 돌리는 왜소한 발이다 그는 두 발로 성큼성큼 걸어들어가 무덤 문을 다시 쾅! 닫는 사람이다
김봉식 시인 / VERY FIRE에 관한 반가사유 그대가 엄지를 치켜세우며 툭, 던진 우스개 한마디 VERY FIRE! 나는 ‘아주 혹은 매우’와 ‘불’ 사이에서 길 잃고, 문득 말(言)의 창세기 한 페이지를 읽는다 고대 각국의 신(神)들이 ‘불’을 수식할 수 있는 격조 높은 ‘품사(品詞)’에 대해 열띤 토론을 시작했다 대체로 붉고 차갑고 말랑말랑하고 악취 나는 몇몇의 ‘형용사(形容詞)’들과 구름과 건초와 포도주와 대리석과 동으로 건축한 왕국이나 신전 따위 같은 우아한 ‘명사(名詞)’들이 구설에 올랐다 우주의 본성을 깨닫게 하는 ‘부사(副詞)’는 동산의 생명나무에 봉인된 금단의 열매였으므로, 어떤 늙은 신(神)은 ‘부사’가 ‘명사’를 수식할 날이 곧 오리라는 한 젊은 예언자의 말에 격노했다 우리들의 구음(口音)은 여전히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은 깊음 위에 있다 -계간 『시산맥』 2013년 여름호 발표
김봉식 시인 / 청년
언제나 푸른 숲을 기다리던
그 청년은 숲속 어여삐 살던 말벌에게 쏘였다
그리곤 아스팔트길 나와 말벌보다 더 아픈 태양에 절뚝 거린다
김봉식 시인 / 아레카야자와 정원사의 꿈
아침이 늘 스미는 창가에는 먼 옛날 남쪽나라에서 날아온 그녀
아레카야자
작은 햇살을 바람을 이슬을 꿈꾸며 초록빛 사나래 펼치고 서 있습니다 팔랑 날아 오르려는 듯
나는 늘 덩치 큰 나무 되어 따가운 햇살을 바람을 빗물을 걸러 내어 줍니다
해밀 같은 날 아침 방그레 웃어주던 그녀가 다시 해거름 무렵 가슴으로 날아 들어와 생그레 웃으며 나를 바라 봅니다
매일 아침 점심 저녁 세번 만납니다 나는 그녀의 정원사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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