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오 시인 / 살판 외 5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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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오 시인 / 살판 비가 오지 않아 마디가 짧아진 오이 지난밤 내린 비로 지네발 덩굴손이 자라고 구부렸던 순이 고개를 든다 옆으로만 퍼지던 오이 마디가 밤새 자랐다 덩굴손이 허공을 타고 길게 올라야 오이도 길쭉하게 주렁주렁 달린다 배밭 포도밭은 또 어떻구 한시름 놓은 거지 나무도 사람도 사십 밀리 비에 이렇게 달라지다니 논에 물이 차고 개울물이 흐르고 이제 살판난 거야 저수지까지 물이 괴면 좋으련만 하늘에 또 맡기는 수밖에 하하 웃으며 담배 한 대 물고 호박밭으로 향하는 해찬 형님 노란 오이꽃 토마토꽃이 옆에서
-시집 <살판>에서
이정오 시인 / 겨울 난간에서
첫눈이 내리는 날이면 왜, 이별하는 사람의 뒷모습이 궁금해질까
돌아올 수 없는 행선지를 밟고 눈발이 독감처럼 지나간 자리 구멍이란 구멍은 다 헐고 빙그르르 현기증을 일으킨다
죽기 전에 그처럼 많이 아파봐야 하는 연습처럼
이별은 자기부상열차일까 정해진 궤도를 따라 출발하지만 언제나 공중에 떠 있는 건 밀고 당기는 운명의 힘이 작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무릎을 구부리고 더 낮은 자세로 조금 더 가까이 가보려 해도
그 아득한 지점에 작년보다 먼 시간이 서성이고 젖은 행간으로 날아든 겨울새 한 마리 상형문자 같은 부리를 좌우로 흔들며 무거운 침묵만을 허락한다
-시집 『달에서 여자 냄새가 난다』에서
이정오 시인 / 하루
고삼저수지 가에 오래도록 서 있어 본 적이 있다
바람은 언제나 다르게 온다 발끝으로 다가오던 어느 바람의 물결은 왕모래를 굴리며 발바닥마저 거머쥘 듯 달려들기도 한다
바위에 넘어지는 자전과 공전의 하루
저 바람 속에 저 물결 속에 서로 다른 내가 들어 있다
-시집 『달에서 여자 냄새가 난다』에서
이정오 시인 / 어느 섬의 아침
난간 위 커피가 뜨거워요 손에 쥘 수가 없어요 원래 뜨거운 것들은 불온한 법이죠 한 왕조를 무너뜨린 혁명도 뜨거운 물방울일 뿐 세상을 온전히 뒤집지는 못해요 혁명에 중독된 아나키스트들은 자기 자신조차 태워버리죠 그래서 불새의 천형이죠 앗, 손을 데었군요 당신 벽난로 위의 붉은 음표가 녹아내려요 손잡이에 물병자리를 새겨 넣을게요 떠나기 전에 어서 연옥에 손을 담그세요 거추장스런 악상기호는 잘라버리세요 오선지에 매달린 감정 음표들 거울 속에서 감출 건가요 셈여림에 따라 거울의 각도가 변해가네요 거울은 방향을 지시하지 못하니까요
-『시와정신』 2015-여름호
이정오 시인 / 한 끼
밥을 먹고 있으면서도 배고픈 기분을 너는 아니? 한 끼 밥을 먹기 위해 몇 시간을 뼈 빠지게 일해야 하는지 생각해 봤냐구
만만한 구석이 없어 편의점을 찾게 되고 편의점에서도 빙글빙글 한 바퀴를 다 돌며 할인행사 하는 걸 찾다가 결국 라면 한 개 삼각김밥 하나 사들고 나올 때 너 그 기분 아냐구
그렇게 통화하며 문을 나서는 한 젊은 아가씨가 있었다
이정오 시인 / 가로등 -장맛비 돌아온 밤 곤두박질치는 다리 위 난무
날벌레들의 경쟁 하나에로의 몸짓, 자유로운 선택 허공 별, 그리운 주검들, 먼 어둠 둥그런 밝음, 또 하나의 완성, 떠오르는 모습들 외길, 어우러지는 날들, 불빛 속 다른 길, 바람이 이는 조그만 공간, 몸통만 남은 기억의 잔해들, 일치, 그리고 웃음 웃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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