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우진용 시인 / 무릎에게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4. 15:09

우진용 시인 / 무릎에게

 

 

폭설로 길이 끊긴

눈의 끝자락

그곳부터 길의 무릎이다.

 

장마로 돌다리 넘는

물의 끝자락

그곳부터 돌의 무릎이다.

 

삐걱거리는 시간으로

관절을 일으켜 세운

그곳부터 생의 무릎이다.

 

세상의 경계에 무릎이 있다.

바닥까진 아직 멀다

꿇지 마라 무릎은, 오직

 

버티는 곳이다. 버티면서 끝내는

등을 일으켜 거기부터 세상

밖으로 나가는 문이다.

 

둥근

문이다.

 

 


 

 

우진용 시인 / 정선생 수족관을 만들다

 

 

첫째날은 교장의 결재를 받고 내려왔다.

둘째날은 틀을 짜고 유리를 맞추었다.

셋째날은 냇가에 가서 모래와 자갈을 가져왔다.

넷째날은 수초를 심고 수포기를 끌어왔다.

다섯째날은 물을 채우고 물레방아를 돌렸다.

여섯째날은 돌고기 송사리 붕어를 잡아들였다.

(일곱째날은 비가 왔고, 그리고 월요일이 되었다)

 

놀라워라, 현관 한가운데 떠다니는 물고기들.

수족이 없는 수족관에 수족도 없는 물고기들,

이유도 없이 항명도 없이 입만 껌벅거리며

魚眼이 벙벙한 채 이쪽에서 저쪽까지 쉴새없다.

 

몰려다니는 송사리나 혼자 뒷짐진 붕어나

일년치 출퇴근을 하루만에 해치우고 있다.

 

-열린시학, 2004년 가을호

 


 

우진용 시인 / 일대기

 

 

나무를 심으면서 지학을 꿈꾼다

잎이 울창해지자 이립을 세웠다

바람에 흔들리며 불혹을 견뎠다

열매로 매달려서 지명을 받는다

어떤 뜬소리도 이순으로 듣겠다

 

이 비탈이 종심從心임을 언제 알 것인가

 

-2010년 『화요문학 가을호』, ≪심지≫에서

 

 


 

 

우진용 시인 / 나무에게 길을 묻다

 

 

팔순의 노모가 무릎을 자주 꺾는다

사람이나 나무나 꺾인 곳이 아프다

 

옹이가 허공으로 가지를 벋어가듯

어머니는 관절로 한 생을 걸으셨다

 

가지들이 손을 펴서 그늘을 드리울 제

관절의 수고로움이 입들을 먹여왔다

 

옹이에서 옹이까지 한 겁을 걸어 돌아와

한 생에서 한 생까지 나무에게 길을 묻다

 

나무는 삐걱거리며 옹이부터 빠지고

낡아가며 어머니는 관절부터 삭인다

 

한때 아름다운 그늘 만들어주던 곳

한때 여러 입들을 먹여 살리던 곳

 

가장 많이 꺾였던 곳이

가장 많이 아프다

 

 


 

 

우진용 시인 / 칼論

 

 

칼국수에서 칼을 떠올리지는 말게

칼이 만난 단면의 순간을 생각하게

 

얽혀 있는 국수가락을 들추지는 말게

칼이 지나온 생의 줄기를 따라가 보게

 

저를 버려 칼은 허공의 끝과 만나지

아슬한 결단의절정에서 날은 빛나지

 

달빛에 젖으면 명검은 운다고 하지

저를 드러내는 운명이 서러운 게지

 

식탁 위에는 칼의 흔적이 널려 있지

쾌락의 천국엔 통증들이 별이 되지

 

칼과 포크는 늘 저쪽만을 향해 놓게

두 팔을 조종해서 칼춤을 추게 해야지

 

그대가 꿈꾸는 세계는 칼끝이 가리키지

반역의 칼춤판에 손잡이는 역사가 잡지

 

칼국수 가락마다 칼의 문신이 새겨 있고

칼의 이론에는 이념의 미각이 숨어 있네

 

남아 있는 국수가락을 더는 들추지 말게

둘러보면 천지간이 칼춤판이 아니겠나

 

-현대시 8월호

 

 


 

 

우진용 시인 / 시인은 새가 되지 못한다

 

 

새,는

날아가는 곳도 모르면서

자꾸

날아만 간다는 것을,

 

저물녘

빈 들판과 낮은 구름 사이

날아가는

지친 왜가리 한 마리를

 

땅과 하늘, 그 사이에서 태어나

새, 라는 이름으로 줄여진 이후

어느 곳으로도 귀환할 수 없는

날갯짓이 벼랑끝 퍼득이었음을,

 

저녁과 밤, 사이에 끼어

왜, 왜, 왜-

의미도 모르면서

자꾸 노래만 하는 저것을,

 

지상의 시인과 닮았다지만

날개를 접고 안착한

시인은

결코 새가 되지 못한다.

 

 


 

우진용 시인

1955년 충남 천안 출생. 충남대, 건양대 대학원 졸업. 2003년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을 통해 등단. 2005년 웅진문학상 수상. 2006년 문예진흥기금 수혜대상자로 선정. 충남시협작품상 수상. 시집 『흔(痕)』 『한뼘』, 교육서 『한자어에 숨은 공부 비법』. 현재 민족문학작가회의 회원, 당진 원당중학교 교장. 중등교장 퇴임 후 숲해설사로 <나무 인문학> 강연활동 중. 수상: <웅진문학상>, <충남시인협회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