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남수 시인 / 수련 외 9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4. 15:33

김남수 시인 / 수련

 

 

 잠속 물궁전 한 채

 

 물문을 열고 들어가네 물방석 위 다소곳한 잠을 보네 젖은 목소리로 너를 부르면 잠을 털고 물 위를 걸어 나오네 정오의 사이렌이 울고 맨발의 네가 혼례청에 들어서네

 

 정오의 신부야

 칠월의 꽃각시야

 

 하루 같은 닷새를 피고 닷새 같은 하루를 피고 우리들의 꽃잠도 피었다 지네 돌아보면 신부는 가고

 

 물 위 꽃신 한 켤레 떠 있네

 

 -시집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에서

 

 


 

 

김남수 시인 / 저수지가 집을 끌어당길 때

 

 

 빈집이 여기 있네

 

 누군가 버리고 간 계절을 껴안고 살아가네

 

 익어가는 계절을 한 잎 두 잎 꺼내 읽으며 나도 빈집으로 살고 싶네

 

 사립문 밖 저수지 몇 평 내 안에 들이고 쌀붕어 가족 키우고 싶네

 

 집이 저수지를 저수지가 집을 끌어당길 때 슬며시 따라가면 밤마다 저수지로 내려가 목을 축이고 돌아오는 빈집의 소문

 

 발 디딘 자리마다 출렁이겠네

 

 저수지가 식솔들 먹여 살리려고 부지런히 한 해 농사를 짓고 있네

 

 가을이면 대소쿠리로 퍼주는 양식

 

 낚시꾼 앉았다 떠난 자리에 빈집을 앉히고 깊어가네

 

-시집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에서

 


 

김남수 시인 / 목련나무 사생활

 

사월이 노크도 없이 목련나무 가지 위에 앉았다

개나리집배원이 혼자 살아요 물으면

목련보다 담장 아래 산수유가

먼저 손을 들었다

문밖에 서 있던 만삭의 수수꽃다리가 적막에 발을 묻고 몸을 풀었다

닫힐 것도 닫을 것도 없는 양철대문으로 흐드러진 몸내가 달려왔다

​​

나무는 가지를 낳고

가지는 꽃을 낳고

지난봄

목런네집, 삐뚤빼뚤 크레용 글씨 꽉 잡은 종이문패를 펄럭이는 바람이 읽고 갔다

빈집이 아니었다

 

 


 

 

김남수 시인 / 길곳간

 

가을이 지나가는 길섶에서 길참외 한 포기를 만난다

벌레가족 식사가 한창이다

온몸이 흠집투성이다.

저들의 양식을 위해 혼자 익어간 길곳간 한 채

가을은 곳간에 자물쇠를 채우지 않고 간다

 

 


 

 

김남수 시인 / 춤추는 야간 신전

 

 그리고

 낡은 짐수레 하나가 전부라고 했다

 

 남자의 집 한 채가 네 바퀴에 실려간다

 붉은 깃발 하나 꽂고

 

 저 집을 신전이라 부르겠다

 

 춤추는 야간 신전!

 

 삶은 올라갈 때보다 내려올 때 아찔하다고 남자의 양팔이 불끈 솟아오르자 덜컹거리는 신전에서 붉은 깃발이 펄럭였다

 

 날개 부러진 선풍기 나를 벗어 놓고 떠난 털장화도 붉은 끈으로 묶여 골목에 어둠을 풀어놓는다

 

 어둑사니에만 움직이는 리어카 고물상

 

 반세기만의 적설량이라고

 자정을 근심하던 곰달래 골목에서

 언덕배기를 내려오는 붉은 짐수레를

 먼 기억의 상엿집으로 읽고

 움찔 물러 서다

 

 뒤돌아보니 남자는 흠집투성이 고물들을 털장화님선풍기님소주병님..…

 하나하나 신의 호칭 같은 이름을

 불러주고 있었다

 

 세상 낮은 곳에 납작 엎드렸던 저것들에게

 

 


 

 

김남수 시인 / 게장님댁 간장게장

 

윗사람 부르듯 정중하게 게장님! 그렇게 불러주는 사람이 있다 하자

대답하지 않는다는 걸 알면서도

간장게장이거나 양념게장이거나

그 집을 찾아가 간장게장을 먹으며 생각한다

대천에서 서울까지 펄펄 뛰는 녀석들을 비닐봉지로 들 숨 날숨 묶어

야간열차 선반에 던져놓고

나는 음악을 듣고 눈을 붙이고

집에 도착하자 살아 있을 때 담가야 제맛 난다고 설설 도망치는 목숨을 항아리에

돌로 눌러 간장을 들이붓고

한 호흡도 걸어 나오지 말라고 뚜껑을 꽉 닫고

그래도 양심 한 가닥 꿈틀거려 미안하다

한 번만 봐 다오 그럴싸한 당부로

입구를 봉했는데

게의 입장에서 보면 사람이나 게나 똑같이

산 목숨인데

꽃게철 가기 전 한 번 더 맛보겠다고 수산시장을 슬쩍 다녀오고

다시는 이런 짓 안 할게 단단한 약속을

쏟아부 었는데

오늘 다시 게장을 먹는다

짭짤한 약속을 아릿하게 찢어먹으며 게장님! 입술을 달싹거리자 집게발이 튀어나와 가윗날을 세운다

허튼 약속을 싹둑 자른다

*

천왕동에 있는 꽃게요리 전문점

 

 


 

 

김남수 시인 / 무아섬

 

 

 길없음  

 나를 통과시키지 않겠다고 붉은 이정표가 고딕체로 누워있는

 길 없는 길을 건너가면

 

 무아에 닿을 수 있을까

 거기 내가 있을까

 무아야무아야 부르면 대답해 줄까

 

 누구는 가는 길이 없다 하고 누구는 돌아오는 길이 없다 하고

 

 한 걸음 다가서면 한 걸음 물러서고 다시 가면 저만치 멀어지는 섬,

 놓고 은 시간들이 밀려왔다 밀려가는 그곳

 

 무아가 살고 있을까

 

 아득한 안개 뒤편

 

-시집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상상인, 2020)

 

 


 

 

김남수 시인 / 4월의 비빔밥

 

 

햇살 한 줌 주세요

새순도 몇 잎 넣어주세요

바람 잔잔한 오후 한 큰 술에

산목련 향을 두 방울만

새들의 합창을 실은

아기병아리 결음은

열 걸음이 좋겠어요.

수줍은 아랫마을

순이 생각을 듬뿍 넣을래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내 마음을 고명으로 얹어주세요

 

 


 

 

김남수 시인 / 소야도

 

 

 덕적도에서 통통배로 달려간 소야리 해변우체국 노을을 찍어 편지를 쓴다 너에게, 가는 길은지척인데 돌아올 길은 아득하다고 아침저녁 안부를 싣고 나오는 발목 부르튼 바람우표 붙이고해당화 붉은 소인으로 봉한다 가며 쉬며 섬인동초 속살 만져보고 기암괴석 삼일쯤 묵어도 좋을느린 우편으로 보낸다 물때에 져버린 석화들이 길 안내로 서 있는, 지난해 안부를 싣고 떠난쪽배 행방도 묻고 가라고 하루 두 번 물길을 열어주는 무인도, 반송되어 올 너를 안을 수 없어보내는 사람 주소는 하얗게 비워둔다

 

 나 여기 바닷가 모래밭에 발 벗고 시간도 벗고 앉아 물푸레 같은 소야! 너를 당겼다 풀며느리게 느리게 늙어 갈 테니까

 

-시집 <장미가 고요하다>에서

 

 


 

 

김남수 시인 / 숟가락에게 밥을 먹이다

 

 

싱크대 서랍 속 숟가락 하나 묻혀 있다

아무도 꺼내보지 않는 녹슨 숟가락을

손잡이 떨어져 나간 아래 칸이 애지중지 보듬고 있다

그 해 여름 물에 젖은 고향마을

되보뚝강가에서 데려온 지 스물일곱 해

무덤 같은 서랍문을 열고 나온다

 

삼백예순 번 두들겨 맞아야 완성되는 방짜 놋숟가락

 

어느 대장장이의 새벽 닭 울음이 미완의 담금질을 서둘러 마무리 했을까

울룩불룩 널브러진 볼

비쩍 마른손잡이

손바닥에 올려놓고 그 아침을 들여다본다

 

산 아래 발 벗은 움막집

오글오글 무 속 파먹으며 겨울을 건너왔을까

 

재 너머 방물장수 등에 업은 애기

한 술 두 술 집집마다 얻어 먹여도

칭얼대는 해질녘, 동구 밖

버드나무 그늘 떠먹이다 늙어갔을까

 

모서리마다 마프게 핥아주다

밥상머리 한번 올라보지 못한 낡은 숟가락

오랜만에 따순 밥 지어 고봉 한 술 떠먹인다

 

-시집 『장미가 고요하다』에서

 

 


 

김남수 시인

충남 부여 출생. (본명: 김남순). 2008년 《평화신문》 신춘문예로 등단. 2009년 《시안》 신인상 당선. 시집 『장미가 고요하다』 『둥근 것을 보면 아프다』. 2011년 서울문화재단 작가창작 활동 지원금 수혜. 2018년 한국문화예술위원회 아르코 창작 지원금 수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