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김현옥 시인 / 내막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4. 15:49

김현옥 시인 / 내막

 

 

어쨌든 대부분 내막은 알 길 없었지만

그냥 또 아무렇지도 않게 그것을 지나쳐갔지

우리가 알고 있는 것이

다만 포장지나 짙은 화장

혹은 검은 비닐봉다리나 가면뿐이라 해도

우리는 건배를 하고 풍문들이나 안주 삼았지

 

우리가 역사라고 알고 있는 것이 혹,

내막의 화려한 의상들이지는 않을까?

역사보다는 야사가 내막에 더 가까울까?

 

내막은 꽁꽁 숨겨져 있다가 실종되든지

비명도 없이 생매장되어 버려도 알 도리 없으니

내막의 운명은 비통할밖에

 

어쨌든 빙산의 일각들만

그것도 제멋대로의 포커스나 렌즈로 보고 살아가도

일상의 가동엔 아무 지장 없으니

내막 따윈 아무래도 괜찮은가?

 

내막 바깥층만 훑어도 흥미로운 것들이야 많지

그것만 핥아도 일생 바쁠 거야

근데, 화려한 자서전을 대필한 사람들은

내막을 잘 알고 썼을까?

 

역사에서 홀연히 사라져버린 숱한 내막들

사교에서 당연히 매장되는 불쌍한 내막들

너와 나 사이에 결코 손 잡을 수 없는 몇 개의 내막들

 

 


 

 

김현옥 시인 / 생에 대한 예의

 

 

내 생엔 왜

그럴듯한 서사가 없고

이미지만으로 기억될 서정뿐인가

한때 그게 궁금했다

 

누군가에게 자랑스럽게 뿜어낼

스토리가 없다는 건

잘못 살아온 것인가?

 

일찍 핀 꽃들이 부러운 때도 있었다

일찍 핀들 늦게 핀들 무슨 상관이랴 싶어지니

늦은 꽃들에게 시선이 갔다

마침내 피워낸다는 게 너무 경미로워

길바닥에 주저앉아 피어난 쬐끄만 풀꽃에게

와우, 야 반갑다, 축하해!

 

다만 한번은 꽃 피워내고 이 땅을 떠나는 것이

생에 대한 예의 같다

서사든 서정이든 여기든 저기든

꽃의 토양은 씨앗의 날개에 달린 일

 

어쩌랴, 안간힘으로

화알짝, 우두둑! 기지개 펴보자꾸나

 


 

김현옥 시인 / 고해성사

 

 

눈이있어도보지못하고귀가있어도듣지못하고입이있다고처먹기만했으니나는한덩이똥이었나이다神이시여,

 

똥이 똥을 구원할 수 있나이까

내가 구더기의 밥이라도 된다면

구더기는 나를 구원하나이까

나를 흔적 없이 먹어 치우고

날개 단 세상으로 가는 구더기의

달디단 밥이라도 된다면

나는 어디론가 갈 수 있겠나이까

 

딴세상이아니라이세상이라도보고들으라하시나이까당신이내어주신숙제다하고나면들끓는똥한덩이,저물녘강속으로가라앉은산그림자처 럼고요해지겠나이까

 

 


 

 

김현옥 시인 / 그는 시의 요리사

 

 

자 여기 오신 당신들을 환영합니다

당신들의 삶이 출출하다면 더욱 환영합니다

 

그는 조물조물 꽃과 미소와 햇살을 버무려

신기한 무공해 반찬을 만들고

상처와 슬픔을 씻어 사람을 안쳐 밥을 하고

배반과 치욕을 진실의 소스로 지지고 볶아

화끈한 덮밥소스를 만들고

노래와 춤과 합장을 버무려 샐러드를 만든다

디저트로 침묵차가 나온다

풀코스를 대접하는 그의 손은 따스하고 날렵하다

삶의 자판기 위에서 시를 요리하는

정답고 환한 마음의 손가락들

 

자신이 한 밥을 나눠 먹는 것,

그것이 사람이라고 그는 믿는다

그래서 그의 요리 실력은 일취월장

 

밥상에 둘러앉은 사람들의 얼굴이

황홀한 해바라기꽃으로 피어난다

참 마법사 같은 요리사예요 당신은

사람들은 그러한 답례의 찬사를 잊지 않는다

그들의 멈춘 심장이 뛰기 시작했으므로

 

세상이 둥근 밥상이 되는 날을 꿈꾸며

그는 마음 고픈 자들을 시의 밥상으로 초대한다.

 

 


 

 

김현옥 시인 / 연인

 

 

네 가슴의 서늘한 건반 위에서

재즈의 손가락으로 불꽃처럼

춤추고 싶어, 즉흥적으로

 

애초에 너는

그리움과 기다림으로

단련된 손가락들의 연민

 

너의 단아한 흑과 백의 삶을

재즈의 춤추는 손가락으로 어루만져

연주하고 싶어, 총천연색의 음악

 

 


 

 

김현옥 시인 / 의자 · 계단 · 창문

 

 

낡고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 앉아

그녀는 창 밖을 건너다 보며

태양의 느린 걸음을 지켜보았다

그녀의 지겨워, 라는 중얼거림이

하루종일 구름 몇 송이로 떠 다녔다

암수 붙어 해롱대며 날아가는 잠자리들이

엑스트라처럼 그녀의 창문을 지나갔다

은빛 날개 번쩍이며 하늘의 전령사라도 되는 듯

비행기 한 대가 바쁘게 비명 내지르며 달려갔다

이름도 알 수 없는 새들은

그녀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들의 떠나가는 뒷모습처럼

하늘 깊숙이 점점이 침몰해갔다

모든 것들, 그렇게 아무 일 아닌 듯 그녀의 창문을 다녀갔지만

그녀의 창문 같은 수많은 창문들을 지나 발랄하게 제 갈 길 떠나겠지만

죽을 때까지 떠나지 못할 키 큰 나무 한 그루,

사랑이란... 그 끔찍하게 지겨운 기다림?

 

지겹고도 지겹게 그녀는 그 곳에 앉아 있었다

마치 못박혀 있는 듯, 정물처럼

어쩔 수 없이!

키 큰 나무, 어느 날 그녀에게 사랑을 가르쳐줄 때까지

 

〈내 몸 속의 무수한 계단들, 하늘이 날 부르면

난 매일 휘파람 불며 그 계단들 오르며 내 얼굴을 버리지

내 몸의 창문들, 그 수만 개의 이파리들 활짝 열면

바람과 햇빛들 놀러와 나를 투명하게 반짝여대지〉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김현옥 시인

1963년 경북 영덕에서 출생. 경북대학교 인문대학 영어영문과 및 同 대학원 졸업. 1994년 《영남일보》 신춘문예, 199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등단. 시집 『언더그라운드』 『니르바나 카페』 『그랑 블루』 『룸펜들』. 현재 〈시·열림〉 동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