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시인과 시(현대)

이종성 시인 / 밥 외 5편

파스칼바이런 2025. 8. 5. 12:18

이종성 시인 / 밥

 

 

허기져 그루터기에

앉아 김밥 먹다 보았다

이름난 꽃도 아니고

눈에 띄지도 않는 좁쌀보다

작은 풀꽃, 가만히 보니

벌도 와서 먹고, 나비도

와서 먹고 간다

먹고 갈 때마다 휘청

쏟아지는 꽃밥, 식구들

눈에 밟히는지

개미들 하나씩 물고

재재 집으로 간다

 

 


 

 

이종성 시인 / 무이구곡武夷九曲

 

 

제1곡 제월대霽月臺

 

입춘의 문턱에 종일 비가 내리다 그치니

차고 시린 눈 녹은 계곡물 불어나길 기다려

보름을 넘긴 달이 청화백자처럼 얼굴을 씻고는

홀로 지리산 천왕봉의 등천을 준비하네.

 

있어도 없는 듯 숨었던 도솔암 풍경이

구곡산 능선 위로 달이 기동을 시작하자

제 몸 두드려 어둠 깊은 별들을 깨우고는

반짝이는 천지의 고요에 몸을 숨기네.

 

제2곡 무위폭포無爲瀑布

 

목숨 맡긴 푸른 하늘 석벽의 청류로 떨어져

방울방울 탕탕한 옥류의 빙결된 물방울들

수정 같은 보석되어 알알이 주렴으로 걸리고

깊은 소를 가득 메워 물소리 자글거리네.

 

한 호흡 가다듬고 반석에 앉아 눈을 감으니

바람조차 명경에 소리 없이 미끄러지고

미동도 없는 바위를 세차게 치던 청탄옥류도

문득 흐름을 잊었는지 홀연 소리가 없네.

 

제3곡 영춘대迎春臺

 

겨울 산빛이 깨지는 양지바른 산자락

심설 속에 혹한의 오랜 안거를 풀고

벼린 칼끝으로 언 땅 밀치고 올라온 춘란 포기들

잎 끝이 하나같이 뭉툭하게 잘렸네.

 

몰래 칩거하는 허기진 산짐승이 눈밭 헤치고

가쁜 숨 쉬며 뜯어먹다 내뿜던 허연 콧김이

이제 막 피어나는 소심의 꽃향기로

뭉글뭉글 코끝을 스치며 산중에 퍼지네.

 

제4곡 화암폭포花巖瀑布

 

한 번 굳히면 미동도 없는 마음 바위를 얻었으니

물은 쉴 새 없이 바위를 문질러 이끼를 닦고

물을 얻으러 폭포로 왔던 나무가 다시 그 바위를 얻어

좌망에 이르러 서로가 묵묵부답 꽃핀 줄도 모르네.

 

마음이 없어 바위도 없고 물을 잊어 꽃도 잊은

바람 자고 파도 그친 이 지이 異한 고요

땅은 하늘을 얻어 물음을 잊고 하늘은 땅을 얻어

만 가지 물음의 씨앗 대지에 뿌려 무성히 가꾸네.

 

제5곡 청벽대靑碧臺

 

쇠딱따구리가 홀로 은거하는 무성한 굴참나무 숲

끼니를 탁발하는 탁목소리 맑게 산을 울리고

메아리치며 중중무진 하늘로 번지는 둥근 탁음

쪽빛 하늘에 대못처럼 깊숙이 박혀 이내 사라지네.

 

밤이 되어 못 박힌 청음의 자리마다 빛나는 별들

소리는 반짝반짝 빛으로 산란하여 되돌아오고

밤하늘 올려다보며 호명하는 누군가를 만나러

만길 어둠의 벼랑을 청별 하나가 홀연히 뛰어내리네.

 

제6곡 입직대立直臺

 

풀과 나무와 바위에게도 언제나 바른 일심 있어

풀과 나무는 주저앉지 않으며 바위도 몸 눕히지 않고

창천 향하여 기심 없이 한 서원을 세워 빌고 비니

하늘의 뜻을 입어 쌓은 돌탑 무너지지 않네.

 

여기서는 빗방울도 단번에 오고 햇빛도 달빛도 그러하니

곧장 어둠을 비춰 만물의 면목이 그대로 드러나고

일신이 곧은 나무들 쓰러져도 곧게 쓰러져

일직당의 기둥 되어 푸른 하늘 늠연히 떠받치네.

 

제7곡 등천문登天門

 

숨이 턱에 차도록 가파르게 올라선 불평의 평지

고도 높은 바람을 맨 먼저 맞다 더 먼저 와있던 바위에

몸을 밀착시켜 불일이나 불이가 된 소나무 흰 눈 덮어쓴 채

장암杖岩과 함께 도솔천 하늘에 오르는 산문 되었네.

 

저 아래 도솔암은 누군가를 기다려 문 열려있고

바다의 해연海緣에 이끌려 덕천강의 강물이 되어

산을 나와 흐르는 내원의 물처럼 세상을 나와

된비알 넘으며 도솔천의 미륵불을 만나러 가네.

 

제8곡 관천대觀天臺

 

수천수만의 첩첩 산이 모여 이룬 만덕 서린 수미산

도솔천 아래 장엄히 뻗어 일망무제로 펼쳐지고

피안을 바라보는 시간 하늘의 목소리 들리는가 싶더니

내 돌 눈이 떠지고 산 너머 청하동천靑霞洞天보이네.

 

티끌 하나 없는 광풍제월의 길에서 나를 잊어버리고

십이만 유순의 저 하늘에 오를 사다리를 무엇으로 만들지

그 비밀을 산이 산을 품은 저 큰 산에서 엿보았으므로

산 그림자 거두는 뜻 헤아리며 묵묵히 산을 내려가네.

 

제9곡 수정폭포水晶瀑布

 

벼랑을 만나 날개를 단 무이구곡의 옥계청류

귀를 가진 것들의 막장 어둠 벽 단숨에 뚫어주고

별빛 같은 하늘의 목소리 귀에 대고 들려주며

묵묵 청산의 물줄기 되어 천리 밖으로 흐르네.

 

굽이굽이 휘도는 마음의 아홉 굽이 돌고 돌아

가없는 도솔천의 하늘 일망무제 시야를 얻었으니

어느 어둠이 장막을 드리우고 어디에 티끌이 묻으랴

명경의 물은 스스로 제 족적을 지우며 산문 나서네.

 


 

이종성 시인 / 10원

 

 

늘 누워만 있다.

등이 아프고, 온 몸이 저리다.

엎드리고 싶으나

스스로 뒤칠 힘이 없다

 

기다린다

안으로 옭죄는 고통 견디며

나를 들어 몸 바꿔줄

손 하나

그가 오기를 기다린다

 

언제쯤이었나?

어느 순간에선가 세상에서 거슬러지고

장애로 내려놓여진 내 삶

그 남은 가치만큼 흐르고 싶다

맑은 피가 되어

다시 흐르고 싶다

 

-무크지 <수주문학> 2008년

 

 


 

 

이종성 시인 / 당진형수사망급래

 

 

내 눈물은 배롱나무꽃이다

누군가에게 영혼을 바쳐본 이는 안다

마음이 마음을 지나면 그 색으로 물이 든다는 것을,

내게도 안팎으로 곱게 물들던 시절이 있었다

유년의 바깥마당 환하게 핀 나무 아래로

꽃이 되어 걸어 들어온 사람 있었다

그날부터 뭉실뭉실 하늘에는 꽃구름이 일었고

산 너머 종달새는 보리밭을 푸르게 일으켰다

밤에는 별을 따라 반딧불이 어둠을 날았다

 

마음이란 그렇게 하나의 삼투현상이어서

색깔이 바뀌고 날개를 달아주는 신비한 현상

처음으로 그때 한 사람의 색으로 치환이 되었다

그 후로 나는 세상의 어느 색으로도 물들지 못 했다

 

지금, 형수님 산소엔 배롱나무꽃이 한창이다

간밤 비에 젖은 봉오리 뚝뚝 지고 있다

아직도 떨리는 손에 든 한 통의 비보

글씨 위로 꽃잎이 붉다

 

-2007년, 제9회 수주문학상 당선작

 

 


 

 

이종성 시인 / 소쩍새

 

 

솥이 작다고 우는 소리가

아니지요

솥쩍 솥쩍 하늘이 작다고

끓어 넘치는 별들이

아우성 댄다고 우는

저 머언 은하의 전언이지요

솥쩍 솥-쩍

마음이 우주여야 한다고

애끓게 우는

별들의 울음이지요

오늘이 아니면 들려줄 수 없다는

천년의 내 목소리이지요

 

  


 

 

이종성 시인 / 삼천사지 마애불의 미소

 

 

하늘과 땅과 상람의 마음에

흐르는 세 물 줄기 있다

하늘과 땅과 사람이 천년을 기울여

씻고 씻어서 빛나는 삼매의 미소가 있다

스스로를 밀고 밀어가는

동심원으로 세상에 번지며

삼천대천의 하늘을 저녁마다

붉게 물들이는 금빛 미소가 있다

어긋났던 몸과 마음이

비로소 이어져 화해하고

눈물이 단청을 입는 형통의 미소가 있다

문득 잃어버린 미소를 찾고 싶을 때

미타교 건너 대웅전 꽃살문을 돌아

삼천리를 한 걸음에 찾아 가는

깊은 골짝의 미소가 있다

 

 


 

이종성 시인

1993년 《월간문학》 신인상 당선. 시집 『그곳엔 갓길이 없다』 『바람은 항상 출구를 찾는다』 『산의 마음』 등. 포토에세이집 『다 함께 걷자, 둘레 한 바퀴』 『지리산, 가장 아플 때 와라』 등. 수주문학상, 한국산악문학상 등을 수상. 현재 공간시낭독회 상임시인, 숲과 문화 연구회 등에서 활동 중임. 현재 서울에서 중학교 교사.